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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9>老兵이 걸어온 길-119-미국시찰과 교육

입력 2008. 12. 04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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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일간의 워싱턴 일정을 마친 나는 뉴욕으로 가서 웨스트포인트(미 육사)와 미1군사령부를 방문했다.

    웨스트포인트에서는 다부동 전투를 함께 치른 마이켈리스 대령을 재회했다. 그동안 그는 준장으로 진급해 그곳 생도대장을 맡고 있었다.

    웨스트포인트는 맥아더·패튼·아이젠하워 같은 명장을 길러낸 학교답게 명예·의무·국가를 모토로 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때 내가 웨스트포인트에 기증한 태극기는 아직까지도 학교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들었다.

    뉴욕서 맥아더 장군 재회 생생

    뉴욕 일정 중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 펜트하우스에서 맥아더 장군과 재회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노병’은 여전히 정정한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나는 미국 기자들의 주목 대상이었다. 가는 곳마다 기자들이 따라다니면서 인터뷰를 요청하고 내 동정을 보도했다. 한국전쟁 휴전문제가 최대의 관심사가 돼 있을 때여서, 당사국 육군참모총장이란 인물이 뉴스거리였던 모양이다.

    기자들은 주로 휴전에 관한 것을 물었다. “언제쯤 휴전이 되리라고 보느냐”는 식이었다. 한 번은 그런 질문을 받고 “신(神)만이 알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다음날 아침 신문의 1면 제목이 “Only God Knows”였다.어떤 기자는 “동양 사람은 대개 키가 작고, 안경을 쓰고, 금니를 했던데 당신은 왜 그렇지 않은가?” 하고 물었다. 기분이 상해서 “그런 질문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더니 기자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조지아 주 보병학교(Fort Benning)와 통신·헌병학교(Fort Gordon)를 시찰할 때는 유학 중인 국군장교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 특히 보병학교에는 수백 명이 유학 중이어서, 마치 한국의 육군보병학교에 온 느낌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장교를 유학 보내려고 애쓴 보람이 있었다. 동시에 한국 장교들을 이렇게 많이 받아 가르쳐 주는 미국이 고맙기도 했다.

    각종 군사시설과 교육기관 시찰 일정이 끝난 뒤 나는 캔자스 주에 있는 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다. 2주일간의 교육 스케줄이라고 했다. 그 학교에서 이종찬·장도영·최영희·박병권·정래혁·안광호 등 유학 중이던 육군 장성들과 반갑게 재회했다. 함께 전선을 누비며 고생한 전우들을 만리타국에서 만난 느낌은 각별했다.

    교관 20여명이 각분야 개인지도

    지휘참모대학 교장은 마침 나와 함께 휴전회담 대표로 같이 일한 인연이 있는 호디스 소장이었다. 한국전선에서 여러 가지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을 만나본 것도 우연 치고는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에 대한 교육은 특별했다. 나 하나를 상대로 20여 명의 교관이 분야별로 속성 전문교육을 했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작전 이론에서부터 병참·군수·통신·수송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를 요약 중심으로 가르쳐 줬다.교육이 열흘쯤 진행됐을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총장, 그쪽 형편이 그리 급하지 않으면 그만 돌아왔으면 좋겠네.”전화를 받기 이틀 전 미국 신문에 “한국의 이 대통령이 백선엽 장군을 소환할 것”이라는 기사가 보도된 것을 봤다. 그래서 짐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기사 내용은 ‘휴전을 반대하는 이 대통령이 미국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미국유학 중인 장교들을 다 소환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직접 전화를 받은 나는 교육을 포기하고 급거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장교들은 다 그대로 있었다. 엄포에 그친 ‘전원소환’이었다.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정리=문창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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