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5일은 6·25전쟁 당시 육군종합학교가 창설된 지 55주년이 되는 날이다. 종합학교의 존속 기간은 불과 1년여에 불과했지만 7004명의 육군 장교를 배출, 전쟁 위기 극복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큰 전공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종합학교 출신 장교들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육군종합학교라는 곳도 있습니까? 육군종합행정학교를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육군종합학교 전우회 회원들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맥이 풀린다고 한다. 나라를 지켰다는 자부심만은 누구 못지않음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를 몰라주는 데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종합학교 출신 장교들은 사실 우리 군의 보석과 같은 존재였다. 1950년 8월15일부터 다음 해 8월18일까지 종합학교를 통해 배출된 장교는 육군 7004명, 해병대 284명 등 모두 7288명에 달했다.
같은 기간 신규 임관된 육군 장교 총 수가 1만378명이었으므로 종합학교 출신 장교의 비율은 무려 67.3%에 달한 것. 전쟁의 혼란 속에 육군 장교 양성이라는 핵심 역할을 해낸 곳이 바로 종합학교인 것이다.
종합학교 출신 장교들은 전쟁 기간 중·소대장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전투의 제일선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육종사(陸宗史) 편집주간을 역임한 최현호(崔鉉鎬·종합26기) 예비역 대령은 “전사상자 수를 보면 종합학교 출신 장교들의 공헌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며 “전사자 921명, 전상자 2257명 등 종합학교 출신 장교의 45%가 나라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희생했다”고 역설했다.
김희오(金喜午·종합31기·예비역 소장) 육군종합학교 전우회 회장은 “세계 어느 전사에서도 이같이 높은 장교 손실 비율을 찾아보기 힘들다”며 “6·25전쟁이라는 민족사적 위기 속에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한 주역들이 종합학교 출신 장교들임을 전사상자 비율이 웅변해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종합학교의 개교 과정은 당시 우리 군이 겪었던 고난과 그 극복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전쟁 초기 육군이 입은 인원과 장비 손실은 엄청났다. 특히 소대장 손실 비율은 60%에 이르렀다. 당시 소대장 소요는 2950명에 달했으나 실제 소대장급(중·소위) 인력은 965명에 불과했다.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대량으로 장교를 양성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 역할을 맡은 기관이 바로 종합학교였다. 당시 육군사관학교와 각 병과학교는 인력·시설 손실로 정상 운영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육사와 육군보병학교를 기반으로 남아 있는 교육 관련 인력을 통합한 것이 바로 종합학교의 출발이었다.
종합학교의 운영이 시작된 것은 50년 8월15일이지만 종합학교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50년 9월17일부터다. 51년 2월16일 육군보병학교로 개칭됐지만 같은 해 8월18일 종합학교 32기가 배출될 때까지 학교 정식 명칭에 관계없이 장교 단기 양성 과정이 계속됐다.
종합학교 1기는 전쟁 전 육군보병학교 간부후보생, 종합학교 2기는 육사 생도 2기생으로 각각 충원됐다. 3기부터는 민간인들이 시험을 거쳐 입교했다.
당시 소대장은 육군종합학교 전우회 회원들조차 “하루살이 소모품 소위 신세였다”고 고백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직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많은 사람이 종합학교를 통해 소대장이 되는 길을 택했다.
당시 교육 과정은 6~12주에 불과했다. 장교를 양성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긴급 상황 속에서 필요한 많은 장교를 배출하기 위해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렇게 배출된 종합학교 출신 장교들은 전쟁 기간 중 총 3441개의 훈장을 받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교암산 전투에서 신화적 활약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고(故) 김교수 대위를 비롯해 을지무공훈장 32건, 충무무공훈장 295건, 화랑무공훈장이 3113건에 달했다.
종합학교 출신 장교 중 2688명은 소령급 이상으로 진출, 장기 복무를 통해 군 발전에 계속 기여했다. 고위 장성으로는 2군사령관을 역임한 고 김홍한(金烘漢·종합9기) 장군이 대장까지 진급했으며 중장이 4명이다.
이 밖에 소장 45명, 준장 77명 등 장성급까지 진급한 인원은 총 127명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한 것으로 유명한 박경석(朴慶錫·육사 생도 2기·종합2기) 예비역 준장이나 재향군인회장·국회의원을 역임한 장태완(張泰玩·종합11기) 예비역 소장도 종합학교 출신이다.
85년 6월5일 예편한 김용진(金容振·육사 생도 2기·종합2기) 중장이 종합학교 출신 중 마지막 현역이었다.
장기 복무를 선택하지 않은 종합학교 출신 장교들은 전후 사회에 복귀, 대한민국 건설에 기여했다. 이들은 국가 경제 발전과 산업화는 물론 문화·교육·학계에 진출,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경제계에서는 황경로(黃慶老·종합22기) 전 포항종합제철 회장, 교육계에서는 김기택(金基澤·종합27기) 전 영남대 총장, 학계에서는 식량 증산에 기여한 통일벼를 개발한 정근식(鄭根植·종합27기) 박사, 정·관계에서는 서울시장·내무부장관·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고 구자춘(具滋春·종합9기)씨 등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김병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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