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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제3話 빨간 마후라 -32-작전국장 시절

입력 2005. 04. 29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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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년 10월1일 육군항공대는 공군으로 분리·독립했다. 김정렬 초대 공군참모총장은 나를 작전국장으로 임명했다. 나는 창설된 공군의 위세에 맞게 F - 51 무스탕 전투기 100대 군사 원조 도입과 10개 비행장 확보 계획을 세웠다.

    이 같은 계획은 미국 공군의 개척자 빌리 미첼 장군의 영향이 컸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앞으로는 보병전이 아니라 항공전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보병 출신 더글러스 맥아더의 고발(보병 모독 혐의)로 군법 회의에 회부돼 영관급으로 강등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후 20년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습격을 받아 일대 망신을 당했다. 결국 미첼 장군의 예언을 따르지 못한 대가를 치른 다음에야 항공력을 키웠다.

    미국 본토에서 일본 도쿄(東京)까지 날아갈 수 없어 항공모함을 건조해 전투기를 탑재, 일본을 무차별 폭격함으로써 승리를 얻어낸 것이다.

    항공력을 보강한 미국은 44년 7월8일 일본 규슈(九州) 서북부 지역 폭격을 시작으로 매일 100대 이상의 B - 29 전투기가 일본 본토를 공습했다. 45년 8월9일 나가사키(長崎)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던 날에는 1600대의 폭격기가 일본 동북 지방을 강타했고 300대는 규슈를 공습했다. 원자 폭탄이 아니더라도 일본은 이미 패망하게 돼 있었다.

    나는 이 점을 내세워 공군력 증강책을 제시했다. F - 51기 100대와 김포 비행장을 비롯해 여의도·수원·대구·광주·수영·대전·군산·제주·강릉 비행장 등 10개 비행장을 확보해야 하며 인력 수송 지프 1대, 무전기 1대, 비행장 경비 병력 10개 소대를 지원해 달라는 요청서를 만들었다. 사실 삐라를 뿌리는 연락기 수준의 L - 4 10대와 L - 5 10대 보유로 공군 독립이라고 말하기는 쑥스러운 일이었다.

    이 같은 계획서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부군 시절 중국 공군 창설자인 미 공군의 세놀트 장군에게 보고됐지만 미 극동군사령부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공군이 창설된 마당이니 다시 시도해야 할 입장이었다. 나는 차트를 만들어 육군본부 강문봉(대령) 작전국장을 찾아갔다. 같은 작전국장이라도 그는 대령이고 나는 대위였다. 이런 계급상의 차이만이 아니라 공군은 여전히 육군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형님, 도와주십시오.”

    일본 육사1기 선배인 그와 나는 사적으로도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내 설명을 듣고 난 강국장은 “너 잠꼬대하냐”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물었다.

    “지금 보유하고 있는 비행기가 몇 대지?”

    “20대입니다. 그것도 한 대는 북으로 넘어가 버리고 또 고장난 것도 있고 해서 열여덟 대만 쓸 수 있습니다.”

    “잠자리 비행기 말이지? 그 비행기 지키려고 병력 10개 소대를 주고 자동차를 주고 비행장 10곳을 달라고?”

    “앞으로가 문제 아닙니까. 당장 눈앞의 것만 가지고 말할 수 없죠.”
    “지금 당장이 더 중요해, 인마!”

    한마디로 거절이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장 이해심이 있어야 할 작전국장이 그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형님은 앞으로 비행기 탈 생각 마시오. 죽을 때까지 지프나 타고 다니시오.”

    나는 이렇게 쏘아붙이고 돌아왔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며칠 후 나는 부관을 데리고 수원 비행장으로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비행장이 아니었다. 활주로까지 온통 옥수수 밭이었다. 주변 밭보다 더 잘 자란 옥수수 밭이 질펀히 뻗어 있었다.

    나는 한쪽에서 옥수수 밭 고랑을 매고 있는 농부를 불러 세웠다.

    “이곳이 비행장인데 어떻게 이렇게 옥수수를 심을 수 있소?”
    그러자 농부가 더 이상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당신이 뭔데 남의 밭에 와서 감 놔라 배 놔라 야단이오?”

    갈수록 기가 막힐 일이었다. 내용을 알아보니 그 옥수수 밭은 안양 교도소에서 죄수들을 풀어 경작하고 있었다. 비행장에 대한 인식이 이 모양이었으니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랴. 나는 귀대하자마자 곧바로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를 소집해 봐야 전체 공군 인력은 6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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