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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제3話 빨간 마후라 -25- 창군 초기의 혼란

입력 2005. 04. 05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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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 8월15일을 기해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좌익이 불법화됐지만 하루아침에 사상과 이념이 손바닥 뒤집듯 뒤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미 군정 시기(1945. 9~1948. 8)는 좌우 대결을 방관하거나 묵인한 상태여서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됐다고 해도 이미 좇고 있는 이념과 사상은 관성을 타고 이어져 가고 있었다.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온갖 테러와 사보타주, 암살·린치가 전국적으로 난무했다.

    이런 혼란상을 보고 싶지 않아 1948년 12월 나는 자원해 김정렬 비행대장 소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행부대는 직접 비행기를 탈 수 있고 하늘을 날면서 한없는 꿈과 이상을 꿈꿀 수 있는 곳이다.

    비행대대에는 3개 중대가 편성돼 있었는데 1중대장은 김영환, 2중대장은 장성환, 3중대장은 김신이 맡고 있었다. 나는 장성환이 이끌고 있는 2중대 선임 장교로 배속됐다.

    미국 군사 원조로 도입한 L-4·L-5는 연락기 수준의 성능인지라 전투 훈련을 펼 수 없었다. 하늘을 날며 아름다운 조국의 산하를 내려다보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그런데 이때(1948년 12월) 백모 중사가 L-4를 몰고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항공대 소년 비행병 출신인 백모 중사에 대해 정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당시는 사상까지 따지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다만 인재가 없어 비행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환영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미군은 이를 심각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육군 몇 사람이 월북한 것보다 항공대가 비행기를 이끌고 넘어가는 것을 더 뼈아프게 인식하는 것 같았다. 미군은 이를 빌미로 추가로 전투기를 내주려 하지 않았고 한국군에 비행기를 탈 기회조차 주려 하지 않았다.

    김정렬 비행대장이 논문을 통해 공군의 보강과 독립성을 내세웠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나 20대의 경비행기를 3개 중대로 나눠 훈련을 감행했다. 그중 한 대는 월북해 없어지고 또 한 대는 전명섭 상사가 여의도 비행장 착륙 미숙으로 동체가 망가져 쓸모없게 돼 사실상 18대가 우리가 보유한 항공력의 전부였다.

    북한의 이건순 중위 귀순으로 알려졌지만 북한 공군력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큰 전공을 세운 소련제 전투기 등 210대를 보유한 것에 비해 우리 공군력은 정말 너무나 형편없었다. 호랑이와 강아지 차이라고나 할까.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 여수·순천, 지리산, 38선, 옹진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항공대 비행기가 현장에 투입되기는 했지만 정찰이나 연락 기능밖에 수행할 수 없어 전혀 전투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때 또 이명오 소위가 강·표 월북 사건 선무 작업의 일환으로 삐라를 뿌리기 위해 38선 근처로 나간 L-4에 동승, 조종사를 권총으로 위협해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38선은 연일 충돌로 긴장이 가신 적이 없고 몇 대 되지 않는 비행기는 북으로 도망가 버리니 이것은 군대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런 때 미 국무부는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1949년 6월 말 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완전 철수하고 말았다.

    비행기는커녕 탱크나 포탄 한 발 남기지 않고 모조리 가지고 철수해 버린 것이다. 미국의 방어선은 복잡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물러난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정부가 수립되기는 했지만 나라는 이미 백척간두에 서 있는 입장이었다. 여기에 우리가 갖고 있는 항공력은 잠자리 비행기 17대뿐이었다.

    김포비행장 옆에 미 군사정보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책임자는 민간인 니컬스였다. 그는 한국인 정보원까지 고용, 부지런히 정보를 수집해 본국으로 전송하고 있었다.

    1949년 10월 항공대는 육군으로부터 독립해 공군으로 창설됐다. 나는 작전국장으로 전보돼 니컬스의 동태도 살피게 됐다. 그 결과 미 국방부에 보고하는 문건을 알게 됐는데 “한국 공군은 믿을 수 없다. 비행기를 줘도 가지고 도망가 버린다”는 보고문이었다. 그들은 한국 육군보다 공군을 더 의심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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