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무기의일생

<18>머스탱의 도입과 운용

김병륜

입력 2004. 10. 12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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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전쟁 첫날 북한의 야크 전투기가 한국 공군의 김포비행장을 공격해 왔다. 전투기가 단 한 대도 없었던 공군은 마땅한 대응 수단을 찾지 못한 채 발만 구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처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전투기를 원조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전투기를 제공해 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2년 넘게 거절하던 미국도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입장을 바꿨다. F-51 머스탱 전투기를 한국 공군에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은 F-51 머스탱 전투기 도입 준비 차원에서 1950년 6월26일 10명의 조종사를 선발, 일본 이타즈케(板付)의 미군 기지로 급파했다.
    일본에 파견된 조종사들은 시시각각 악화돼 가는 전쟁 상황에 조바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서울이 함락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 오는 등 고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는 안타까운 이야기뿐이었다. 더구나 일본 현지의 날씨가 계속 흐려 6월26일부터 30일까지 단 한 번도 F-51 머스탱의 비행훈련을 실시할 수 없었다.
    7월1일 이타즈케 미군 기지의 하늘이 맑게 갰다. 이날 파견된 조종사 중 일부가 처음으로 비행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7월2일 한국 조종사들은 F-51 머스탱을 몰고 이륙한 후 곧바로 기수를 돌려 한국으로 향했다. 김성룡 전 공군참모총장은 “당시 비행한 횟수는 단 1회이며 비행 시간도 평균 30분 정도”라고 증언했다.
    당시 기준으로 새로운 전투기에 탑승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0시간의 비행훈련이 필요했다. 여기에 지상교육까지 포함하면 더욱 많은 교육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한국 공군은 최소한 한 달 정도의 교육 기간을 예상했다. 하지만 전황이 너무 급박한 탓에 급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일 한국에 도착한 조종사들은 다음 날인 3일부터 곧바로 출격에 나섰다. 당시 10명의 F-51 머스탱 조종사 중 한 명인 강호륜 공군 예비역 준장은 “실질적인 공격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태극 마크를 단 전투기를 국군에 보여 주기 위해 출격을 감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4일 당시 한국 공군에서 가장 비행 경험이 풍부한 조종사 중 한 명이었던 이근석(준장 추서) 대령이 F-51 머스탱을 몰고 출격 중 서울 관악산 부근에서 적 전차를 파괴한 뒤 적의 대공 포탄에 피격, 전사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F-51 머스탱은 경험이 풍부한 미 고문단·미 공군과 협조 하에 연합 작전을 전개하게 됐다. 경험이 부족한 한국 공군이 단독 출격으로 귀중한 조종사를 손실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공군의 F-51 머스탱이 다시 단독 작전을 감행하게 된 것은 51년 10월부터였다. 이때부터 머스탱은 원산·평양 등 적 후방으로 깊숙이 침투, 후방 차단 작전 임무를 수행했다. F-51 머스탱이 실전에서 거둔 가장 주목할 만한 작전은 평양 승호리 철교 차단 작전이다.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 10km에 위치한 교량으로 적의 군수 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미 5공군은 여러 차례 승호리 철교를 폭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미 공군은 한국 공군에 승호리 철교 폭파 임무를 인계했다.
    52년 1월12일 한국 공군10전투비행전대의 F-51 머스탱 5대가 승호리 철교에 폭탄을 투하했으나 작전은 실패했다. 폭탄이 철교 교각 사이의 모래나 강물 속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 고민하던 10전투비행전대장 김신(전 공군참모총장) 대령은 폭격 방법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8000피트 고도에서 강하해 3000피트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던 방식에서 4000피트 고도에서 강하해 1500피트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초저공 폭격 전술을 택한 것이다. 이 방법은 위험 부담이 높았으나 한국 공군의 명예를 걸고 승호리 철교를 반드시 폭파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조치였다.
    51년 1월15일 한국 공군의 F-51 머스탱 2개 편대 6대가 김대령의 새로운 폭격법에 따라 승호리 철교를 파괴하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한국 공군이 미 공군에 뒤처지지 않을 만큼 성장한 것을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한국 공군이 최초로 도입한 F-51 머스탱은 10대였지만 전쟁 중 계속 충원돼 53년 휴전 당시 공군은 총 80대의 F-51 머스탱을 보유했다. 이후 F-86 등 제트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F-51 머스탱은 56년 8월5일부터 조종사 훈련용으로 전환됐으며 57년 6월29일 완전 퇴역했다. 머스탱의 운용 기간은 단 8년에 불과했지만 어떤 전투기보다 공군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전설 속의 전투기라고 할 수 있다.

    김병륜 기자 < lyuen@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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