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세계의명장

세계 명장 열전<64>올리버 크롬웰(영국) -하-

입력 2003. 11. 27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0:22
0 댓글
  • 크롬웰이 창설한 기병부대는 첫 전투 때부터 전과를 올렸다.

    크롬웰의 기병대가 연전연승 전공을 세우자 그는 곧바로 대령으로 진급해 연대장이 됐다. 그가 지휘하는 연대는 1643년 5월13일 그랜탐에서, 그리고 7월에는 버레이 하우스와 게인즈버러에서 왕당파군에 전승을 거뒀다. 크롬웰의 기병연대는 그후 14개로 늘어나면서 철기대(鐵騎隊)라는 호칭을 얻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연대가 1643~44년 겨울 전투에서 승리한 데 대해 장병들과 지휘관들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경칭이기도 했다.

    크롬웰은 1645년 반군부대들을 ‘신형 모범군’이라는 이름 아래 전면개혁했다. 그는 단순히 의원직책을 가졌기 때문에 지휘관 자리에 오른 장교들을 내보내고 그자리를 실제 군인자격을 갖춘 정예 장교들로 채웠다.

    이 전면적 군사개혁 후 크롬웰은 전 기병부대를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승진, 전군의 군대개혁과 군기확립을 위해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 대대적 군사개혁으로 영국 역사상 최초로 직업군인이 탄생했으며 이들은 붉은 군복을 지어 입었다. 이 군복은 그후 수 세기 동안 영국군의 상징으로 계승됐다.

    1645년 6월14일 크롬웰의 기병부대와 신형 모범군은 네스비 전투에서 왕당파군을 격파했다. 신형 모범군이 그 후 몇 차례 승리를 거둔 다음 1646년 의회 반란군은 왕당파군과 불안한 1차 휴전을 체결함으로써 내란은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후 일어난 복잡한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로 인해 1648년 다시 제2차 내란이 터졌다.

    크롬웰은 웨일스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를 즉각 진압하고 이어 프레스턴 전투에서도 왕당파와 연합한 스코틀랜드군에 대승을 거뒀다.

    1649년 크롬웰은 의회군과 협의한 끝에 사로잡은 찰스 왕을 처형했다. 이때 찰스 왕의 아들 리처드가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처형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찰스 왕 처형 후 크롬웰은 전군 총사령관이 돼 영국 제도(諸島) 안의 모든 저항세력을 완전 소탕하기 위한 대대적 작전을 개시했다.

    그는 그해 8월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 상륙하고 9월에는 드록헤다의 가톨릭 요새를 점령했다. 크롬웰의 부하들은 이 전투에서 더블린 민간인들을 포함, 살아 남은 적군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다른 아일랜드 수비군들은 학살을 면하기 위해 즉각 항복했다.

    크롬웰은 1650년 봄까지 나머지 아일랜드 저항세력들을 소탕한 다음 스코틀랜드 반란군과 싸우기 위해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평소 전투 때 자기 부대가 수적으로 우월하지 않으면 좀처럼 적과 겨루지 않았다. 그러나 던바 전투에서는 자기 부대 병력 1만2000명의 두 배 가까운 스코틀랜드군과 마주치지 않으면 안됐다.

    그는 때로는 폭풍우를 이용, 비밀리에 자기 부대 이동을 감행하면서 스코틀랜드 반군을 공격, 궤멸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크롬웰은 워체스터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반군의 최종 잔여 저항세력을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크롬웰은 오랜 기간 피땀 어린 헌신과 슬기로운 전략·전술을 구사, 흩어진 영국 제도의 모든 섬을 마침내 단일정부 통제 아래 통일했다.

    호민관으로서 크롬웰의 통치는 단지 5년으로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1658년 5월3일 59세 생일 직후 런던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의 국립묘지 격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됐다.

    그의 사망 후 아들 리처드가 직책을 인계받아 권력을 승계했지만 그는 권력을 지탱할 능력이 없었다. 이때 영국 정치가 복잡하게 얽혀 권력투쟁을 거쳐 과거 내란 때 크롬웰이 처형한 찰스 1세의 아들이 1660년 다시 왕권을 되찾았다.

    크롬웰의 통치기간은 짧았지만 그시대 영국정치의 주역으로서 미래 영국정부와 군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비록 독재를 했지만 그가 만든 민주적·제도적 장치들은 궁극적으로 130년 후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에 간접적 영향을 끼쳤다. 크롬웰의 사망 후 영국에서는 숱한 정부가 부침했지만 그가 창안한 신형 군대구조와 민주정치 틀은 영국으로 하여금 수백 년 동안 세계적 강국의 자리를 지켜주었다.

    〈남북전략연구소장 여영무 www.libertyclub.org〉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