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전쟁에도 전운(戰運)이라는 것이 있는데 개중에는 유난히 전운이 없는 장군들이 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제3사단장이었던 유승렬(劉昇烈·육사 8-1·소장 예편·작고)대령의 아들이자 제7사단장이었던 유재흥(劉載興·군영·중장 예편)준장이 그런 경우다.
내가 속한 제2사단 병력을 배속받은 유재흥 장군은 개전 초기 적의 주공로인 의정부 축선에서 2개 사단을 지휘,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패배했다. 다만 1950년 9월 영천 전투에서 미군의 탱크 지원을 받아 처음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듬해 5월 다시 치욕적인 패전을 경험하게 된다. 51년 5월16∼22일까지 벌어진 강원도 현리 전투가 그것이다.
중공군 공세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는 현리 전투는 중공군의 제2차 춘계 공세(5월 공세) 당시 인제 남방 관대리에서 가리봉(해발 1519m) 간을 방어하던 국군 제3군단(제3, 9사단)이 중공군 2개 군(제1, 27군)과 북한군 3개 사단(제6, 12, 32사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한 후 하진부리 부근까지 후퇴하게 된 철수작전이다.
5월16일 오후 6시쯤 중공군은 제7사단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해 2개 연대를 붕괴시킨 후 계속 진출, 국군 3군단의 퇴로가 되는 오마치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17일 오전 7시쯤 처음 1개 중대 규모였던 중공군의 오마치 점령부대는 계속 증강돼 오전에는 대대 규모, 오후에는 연대 규모, 야간에는 1개 사단 규모로 확대됐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국군 제3군단의 경우 17일 오전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전방부대들이 현리 일대로 집결했다. 오후 2시 현리 비행장에 도착한 유재흥 3군단장은 9사단장으로부터 주력으로 오마치 고개를 돌파, 퇴로를 개척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그 후 아군은 제3, 제9사단에서 1개 연대씩을 차출해 오후 9시 오마치 돌파작전을 시도했으나 실기(失機)한 공격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오마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2개 사단의 병력과 포차·차량 등이 협소한 공간에 일시에 집결되면서 대혼란이 일어나 각 부대는 통제를 상실한 채 공포감에 휩싸여 무질서한 철수를 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 지휘관은 계급장을 떼고 있어 누가 장교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었으며 병사들은 무기를 버린 채 도망가는 등 혼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 중에는 제3사단장 김종오(金鍾五·군영·대장 예편)준장과 제9사단장 최석(崔錫·군영·중장 예편)준장, 그리고 제9사단에 군단장을 대리해 훈장 수여식에 참석했다가 미처 복귀하지 못한 군단 참모장 심언봉(沈彦俸·군영·중장 예편)준장 등도 있었다. 유재흥 군단장은 L-19(2인승)을 타고 후퇴했다.
계급장을 떼고 병사들과 뒤섞인 최석 사단장은 병사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가 “나 먹을 것도 없는데 줄 게 어디 있어”라고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또 18연대 2대대장 정승화(鄭昇和·육사5기·대장 예편)소령은 중공군 포로로 잡혀 간고등어를 운반하는 노역을 하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 그해 7월 원대 복귀해 후일 참모총장까지 오른다. 김종오 준장 또한 이듬해 10월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과 맞서 백마고지를 방어함으로써 전쟁영웅으로 육군 대장까지 오르게 된다.
현리 전투에서 제3군단의 무질서한 후퇴와 이에 따른 적군의 추격은 창촌~광원리~하진부리에 이르는 70㎞를 가서야 끝을 보게 됐다. 5월19∼20일까지 하진부리에서 수습된 병력은 제3사단이 34%, 9사단이 40% 정도에 불과했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제3군단의 패퇴 책임을 물어 5월26일부로 군단을 해체하고 한국군 제1군단에 대해서도 육군본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통제하는 조처를 취했다.
<정리:김 당 오마이뉴스 기자 dangki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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