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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話 溫故知新 (39) 광복군 출신 `비극의 장군' 유해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입력 2003. 06. 09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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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전 예·육군중장·前 전쟁기념사업회장·現 한자교육진흥회장

    준 창군(創軍)에 참여한 광복군 출신 중에서 가장 내 기억에 남는 창군 원로는 유해준(兪海濬)장군(군영·소장 예편·작고)이다. 유장군은 일제 치하에 충남 예산농고 재학중 단신으로 중국에 건너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광복군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참전했다가 해방과 더불어 귀국, 국군 창군에 참여하고 우리 군대에 크게 공헌한 분이다.
    그러나 이분의 군인으로서의 생애는 비극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감히 이분을 `비극의 장군'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 첫째 이유는, 조국 광복이라는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와신상담(臥薪嘗膽), 천신만고(千辛萬苦)로 왜적과 싸웠으니, 당연히 개선장군으로 돌아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광복군과 마찬가지로 무장해제된 채 사인(私人)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군인으로서 어디에도 비길 수 없는 통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둘째는 강직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군생활의 처음부터 끝까지 상사들의 질시와 미움을 받아 파면·복직·투옥 등 부침(浮沈)이 되풀이됐다.
    나는 신임장교로서 이분 휘하에서 소대장 및 대대참모를 했다. 이분의 고매한 인품과 인격은 많은 부하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았고 그의 해박한 지식과 경륜, 애국충정에서 우러나온 훈시·훈화는 모든 청년장교에게 감동을 주었음을 물론, 곧 지침이요 가르침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초급장교 시절이라 나는 그의 모든 것을 본받고자 애썼고 그 때문에 나의 장교생활도 그분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심지어 그 분이 안강·기계지구 전투에서 연대장으로 근무중 무고(誣告)에 의해 적전비행(敵前非行) 죄목으로 투옥,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을 때 나는 한낱 초급장교의 몸으로 감히 당시의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참모총장에게 구명복직을 위한 탄원서를 낸 바 있다.

    유장군은 연대장 시절 문란했던 보급군기를 바로잡기 위해 관사에서 소용되는 쌀을 일일이 충남 당진의 시골 본가에서 가져다 지낼 정도로 공사(公私)를 명확히 구분한 분이었다. 이분은 그 뒤로 1967년 8월 1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다가 꼭 30년이 되는 군생활을 마치고 명예롭게 전역했다.

    나는 당시 1군 작전참모로 있으면서 말년에 한직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 지내던 그분의 모습과 많은 장병들 앞에서 말한 전역사(轉役辭)의 끝 대목이 지금도 생생하다.
    “국토통일 성업을 완수할 때가 오면 외견(外見)은 비록 노병이되 계급 불요(不要), 백의종군(白衣從軍)하는 성스러운 마음으로 서슴지 않고 사랑하는 나의 1군에 복귀해 여러분들 앞에 서서 싸울 각오가 돼 있습니다.”

    우리 군은 창군 초기 미군정 당국의 주도 아래 과거 군 경력만 있으면 출신·성분을 크게 따지지 않고 무분별하게 영입했다. 이들 가운데는 일본 왕에게 충성하기 위해 자진 입대, 일본군 또는 일제가 만든 괴뢰국 군대인 만주군 출신으로 수많은 우리나라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를 앞장서서 색출·고문·탄압 한 무리도 포함됐다.

    그리고 이들이 오히려 한평생을 망명의 땅에서 악전고투한 독립군이나 광복군 출신보다 더 출세가도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유해준 장군 같은 지사들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모순이요, 불의로 비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리:김당오마이뉴스기자 기자 < dangkim@empa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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