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베트남)전의 영웅 스톡홀름에 오다'. 주월한국군사령관을 역임한 채명신(蔡命新 ·76 ·예비역 중장) 장군이 1972년 6월 군복을 벗고 그해 10월 스웨덴 대사로 임명 받으며 현지에 도착했을 때 스웨덴의 주요 신문들은 이러한 제목을 달아 그를 대서특필했다. 중립 노선에 따라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북베트남을 지지했던 스웨덴 국민의 당시 대외관에 비춰본다면 아이로니컬한 대목이었다. 프레드릭 스웨덴 국왕(현 국왕의 부친)은 자국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채장군을 자기 옆에 자리하도록 배려도 했다. 채장군을 만날 경우에는 베트남전에 대한 얘기를 장시간 들었다. 채장군에 대한 스웨덴 국왕의 관심이 이 정도였으니 스톡홀름 외교가에서도 그에 대한 관심은 높아만 갔다. 그것은 곧 한국에 대한 관심이었다. 채장군은 이러한 기회를 통해 그들에게 한국을 심었다.
채명신 장군은 스웨덴 언론에서 말했듯 `베트남전의 영웅'이다. 베트남에서의 전쟁이 28년 전 막을 내렸지만 그 전쟁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전쟁영웅으로 부르는 데 인색한 법 없다. 오히려 국내에서보다 밖에서, 특히 당시 베트남전과 관련해 파병을 했던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군 지휘관들이라면 한국의 `제너럴 채'를 모를 리 없었다.
우리 군이 베트남의 정글을 누비면서 자유 수호를 위한 전투를 벌이기는 했지만 그는 당시 전쟁 상황으로 보나 세계의 정치적 흐름으로 보아 그 전쟁은 승산 없는 전쟁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는 그렇게 판단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요인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월남전 한국 작전권 확보 노력
우선 베트남 정부, 즉 정치인을 비롯한 각계 지도층의 국가관 결여를 들었다. 우리 군이 파월되기 20여 년 전부터 줄곧 치러진 전쟁을 겪고 있었지만 그들은 극복 정신이 결여돼 있었고 자립 능력 또한 미흡했다는 것이다.
특히 정치를 하는 지도자들의 부패와 무능은 `정치 따로 국민 따로'라는 형상이 돼 정부의 통제권을 벗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문제는 `붉은 사상'이 `푸르게 위장'돼 사회 곳곳에서 활개를 쳤다는 점이다. 낮에 평화를 외쳐 댔던 인사가 밤에는 적화를 부르짖는 현실이 사이공을 중심으로 확대됐다는 점은 패인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채장군은 이러한 점은 베트남전이 준 교훈으로써 우리가 관심 가질 필요 있다고 했다.
그의 전투적 용맹은 사이공의 분위기가 비록 이렇다할지라도 공산화의 유입을 차단하고자 한 노력에서 빚어진 말이다.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을 지낸 채장군은 2만 여 명에 이르는 우리 군의 정규병력을 이끌었다. 그는 전장에서 발생되는 전투력의 손실을 최대로 줄이기 위해 고심하며 전략을 짜냈다. 이 전략은 그가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임명된 후부터 시작됐다.
1965년 8월 우리 군을 파병하기로 이미 결정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을 주월 미군사령부에 두기로 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 같다는 생각에서 이같은 내용을 브라운 당시 주한 미 대사에게 전했다. 며칠 후 채장군을 부른 박대통령으로부터 이같은 사실을 전해 들은 채장군은 펄쩍 뛰었다. 국군 통수권자의 결정이 잘못됐다며 경악하면서 진언했다. “각하, 적어도 작전에 관해서라면 저에게 맡겨주셔야지 어찌 그리 결정하셨습니까. 이 결정은 잘못된 것입니다” 당시 채장군은 며칠을 고심했다고 했다. 채장군은 분명 대통령의 판단은 문제를 안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은 우리 군이 미군의 작전권에 들 경우 우리 군은 악조건 아래서 전투를 해야하기 때문에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파월을 반대했던 국내 여론에 의해 정부가 비판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장군은 정권 차원의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판단은 예리했다. 그는 파월 2년 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하면서 베트남을 분석했기에 베트남에서의 작전이 어려울 것임을 알았다. 실제로 주월 미군사령부의 작전도에는 이듬해에 파병될 백마부대를 캄보디아 국경 밀림지역을 담당토록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월 미군사령부의 전력 손실은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는 베트콩의 전술에 의해 늘어만 갔던 시기였다. 그러니 미측도 전투 잘하는 한국군을 험지로 투입해 자국군의 희생을 줄여보자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라면 그들의 계획을 무리한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 채장군의 생각이었다. 채장군에게 있어 문제는 그렇다면 이러한 미측의 계획으로부터 벗어날 명분을 찾는 데 있었다. 채장군은 1965년 10월20일 미군 수송기편으로 김포공항을 떠나 그날 저녁 사이공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날 동측 해안 도시인 퀴논으로 가서 맹호 부대의 상륙을 지켜보았다.
채장군은 주월 미군사령부의 성대한 파월 환영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속에는 주월 미군사령부와의 작전권 문제를 놓고 벌이는 담판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치밀한 생각뿐이었다. 장군 27명이 참석해 한 달에 두 차례 갖는 사이공의 주월 미군사령부 작전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미측의 몇 차례 요청도 퀴논에 주둔한 우리 군의 실태를 점검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채장군은 파월 후 12일 만에 그 회의에 참석했다. 퀴논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라슨 야전군 사령관이 신경질적으로 대했다. “한국군은 어째서 우리 통제를 받지 않으려합니까. 우리는 한국군의 봉급을 주고 있지 않소” 그들은 한국군이 미군의 작전권에 들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채장군은 그동안 그렸던 계획을 던졌다. “베트남의 전쟁이 군사적 전쟁이라고 당신들은 말하는데 그렇다면 M -16 소총과 미국 만이 가지고 있는 B-52 전폭기 항공모함 헬리콥터와 같은 전투력으로 무장한 미군이 구식 소총 정도로 무장한 베트콩을 소탕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있단 말이오, 그러고도 이 전쟁을 군사전쟁이라하겠소. 이 전쟁은 분명 정치 전쟁인 것이오. 우리 군을 베트남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으라면 이해하겠소. 그러나 미군 통제라면 이해할 수 없소. 우리도 미국군처럼 베트남의 평화를 지켜주러 이곳에 온 것이니 우리 군의 독자적인 작전권을 갖는 게 당연한 것이오. 당신네 말대로라면 우리는 용병일 수밖에 없는 것이오” 채장군은 30여 분 이상의 강변했다. 뻣뻣하던 라슨 야전군사령관도 그의 말을 듣고 사과했다. 그는 논리적으로 작전권을 주도했다.
軍 지휘 앞서 국익 생각
주월 한국군의 작전은 이때부터 철수하기까지 10여년간 탄력을 받았다. 채장군은 주월 미군사령부가 펴왔던 `탐색-격멸'이란 작전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정글을 뒤지기가 그리 쉬운가. 주월한국군의 작전은 `차단\격멸'이었다. 주민과 베트콩간의 연결을 끊는 민사작전을 통해 주민을 보호해 한국군화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채장군의 구상인 이 작전은 성과가 대단했다.
그는 부대를 지휘하면서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1명의 베트남 주민을 보호한다'는 지휘철학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아는 국내외 많은 사람들은 그의 정신을 높이 산다.
대군을 지휘하기에 앞서 국익을 생각했고 부하의 생명을 지키고자 지략을 구사했던 채장군. 그는 1972년 전역 후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도 국익과 국민을 생각했다. 그는 지금도 군인이고 장군이다. 반공은 철저하다. 지금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것이 있다. 남북 관계에 있어 짚고 넘을 문제는 우리의 평화적 통일 개념과 저들의 개념은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제 군 원로다. 베트남이 패망한 근본적 이유가 어디에 있었나 하는 것과 주한미군의 필요성쯤은 우리가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점을 그는 늘 강조한다.
채명신 장군 누구인가…
채명신 장군은 1948년 5월 개성 송악산에서의 전투 경험이 있다. 육탄 10용사를 낳은 11연대 4중대를 지휘한 중대장이었다. 같은해 4월6일 육사5기로 졸업한 후 육군 소위 계급을 단 그는 임관 4일 만에 제주도 4·3사태 진압군으로 투입돼 공산 게릴라 소탕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51년 6·25전쟁 당시에는 북진하던 중 평남의 산악지대에서 적에게 포위되자 기지를 발휘, 탈출하는 대범함을 보였을 정도로 산악전·게릴라전에 능통했다. 그의 그러한 점이 파월 사령관으로 임명된 배경이다. 파병 임박 당시 맹호사단장으로 있었던 때 정글에 대한 공포로 탈영병의 수가 늘자 “당연한 이치”라며 부대원들을 모아놓고 사중득생(死中得生), 즉 `죽음을 각오하면 산다'며 대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줄 만큼 그는 부하를 아낀 지휘관이다.
주월 미군사령부와 마찰을 빚으며 한·미간의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된 작전권 문제는 그의 철저한 계획이었다. 미군의 항만·공항, 그리고 대량의 군수산업 시설이 있는 퀴논 지역에 주둔하면 우리 기업의 퀴논 진출이 용이하다는 점을 사전에 알았기 때문에 국가경제력 차원에서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국내에 살고 있는 20만~30만 명의 해외 참전 전우들의 모임에 나가 그들의 지휘관이 되곤 한다. 지금 사는 서울 용산구 후암동 집에서 36년째 살고 있다.
경 력
▲1948년 육사5기 졸업 임관 ▲59년 육군38사단장(현 진격부대) ▲60년 육군열쇠부대장 ▲61년 국가최고회의 감찰위원장 ▲63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64년 육군 3관구사령관 ▲65년 주월 한국군사령관 ▲69년 육군2군사령관 ▲72년 6월 육군중장 전역 ▲72년 주 스웨덴 대사 ▲73년 주 그리스 대사 ▲78년 주 브라질 대사
〈사진=정의훈 · 대담=정순훈 기자〉
사진=정의훈^ 대담=정순훈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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