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하기 때문에 불행한… 참혹한 현실의 축소판

입력 2024. 05. 21   15:21
업데이트 2024. 05. 2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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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민의 연구소(연예를 구독하소) 
‘설국열차’ ‘더 플랫폼’ 그리고 ‘더 에이트 쇼’가 말하는 계급사회


시간 쌓일수록 돈 버는 쇼
8층 공간의 여덟 명 이야기
층마다 불평등하게 돈 누적
초반 설정 ‘오겜’ 연상케 해
인간의 이기심·욕망이 만든
사회의 양극화·수직적 계층
여러 메타포로 화면에 옮겨

 

 

“한 달에 쥐꼬리만 한 월급? 그거 모아서 서울에서 집 한 채라도 살 수 있냐?” 가난한 30대 배진수(류준열)에게 솔깃한 말로 투자를 종용하던 선배는 투자금을 들고 잠적했다. 10년을 다닌 출판사 퇴직금을 다 날리고 사채빚까지 끌어안게 된 배진수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끝내 한강 투신을 결심한다. 그 순간 어디선가 도착한 의문의 메시지. ‘당신이 포기한 당신의 시간을 사겠습니다.’ 배진수는 그렇게 ‘더 에이트 쇼(The 8 Show)’에 참여하고 ‘3층’에 머무르며 ‘3층’으로 불린다. 8명의 인물이 8층으로 나뉜 공간에서 벌이는 ‘쇼’의 시작이다.

지난 17일 전 편이 동시 공개된 넷플릭스 8부작 시리즈 ‘더 에이트 쇼’의 초반 설정은 넷플릭스의 글로벌 히트작 ‘오징어 게임’을 연상케 한다. 궁지에 몰린 한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참가한 의문의 게임(쇼)이라는 점, 또 궁극적으로 ‘큰돈’을 벌고자 스스로 위험을 감내한다는 요소가 그렇다. 다만 ‘오징어 게임’이 456명 참가자가 경쟁해 456억 원의 상금을 우승자가 가져가는 서바이벌 데스게임인 것과 달리 ‘더 에이트 쇼’는 정해진 룰 안에서 시간만 착실히 잘 쌓으면 돈이 축적되는 구조다. 위험도나 강제성도 상대적으로 낮고, 모두가 함께 돈을 벌어 ‘쇼’를 종료할 수 있다는 면에서 지극히 평화적이고 희망적이다. 아니, 그럴 수도 있는 쇼였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만 없었다면.

신이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허락한 단 한 가지는 ‘시간’이다. 참가자들은 동일한 유니폼을 입고, 정해진 규칙대로 생활한다. 그 과정에서 흐르는 시간에 비례해 고액의 상금이 자동으로 축적되는 구조이니 ‘더 에이트 쇼’는 언뜻 지상낙원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이런 환상은 삽시간에 무너진다. 층마다 주어진 방 크기가 상이하고, 층마다 축적되는 돈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서로 인지하게 된 순간이다. ‘1층’(배성우)이 분당 1만 원이 쌓이면 ‘8층’(천우희)은 분당 34만 원이 쌓였고, 1층이 하루 1440만 원을 벌면 8층은 4억8960만 원을 벌었다. 공평한 시간이 흘러가지만 공평하지 않은 돈이 누적된다. 이토록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모습은 모두에게 익숙하다. ‘더 에이트 쇼’는 ‘사회 축소판’ 그 자체다.

 

 

‘설국열차’ 사진=CJ엔터테인먼트
‘설국열차’ 사진=CJ엔터테인먼트

 

‘더 플랫폼’ 사진=씨나몬(주)홈초이스
‘더 플랫폼’ 사진=씨나몬(주)홈초이스



나보다 넓은 공간에 살고 내 몇 배의 돈을 축적하는 타인의 존재를 의식한 순간, 인간의 불행은 스멀스멀 싹튼다. 사회에서 자력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벌 수 없었던 큰돈을 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과의 비교는 마음을 급속도로 옭아매고 갉아먹는다. ‘더 에이트 쇼’가 원작으로 삼은 웹툰 ‘머니게임’과 ‘파이게임’의 핵심은 ‘인간은 비교하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사실이었다. ‘더 에이트 쇼’를 연출한 한재림 감독 역시 “남보다 더 잘 살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에 자본주의가 돌아가고, 계급 격차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비교가 빚어낸 욕망의 발로다.

도시락과 물이 최고층인 8층에서부터 아래층으로 분배 가능하다는 사실은 동등한 것이라 여긴 모두를 단박에 피라미드 계층 구조로 소환한다. 저층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고층의 눈치를 살피게 되고, 불가피하게 노동력까지 착취당한다.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은 더 저층민의 몫으로 떠넘겨진다. 강제하지 않아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1~8층의 수직 구조로 형상화된 계층 구조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2013)를 떠올리게 만든다. 빈민굴 같은 맨 뒤쪽의 꼬리칸, 그리고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앞쪽칸으로 상징되는 계급 구조는 ‘더 에이트 쇼’의 그것과 포개진다. 꼬리칸이 앞쪽칸을 갈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1층은 8층으로 오르길 욕망한다.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날 때부터 시작점이 다른 삶,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는 행위는 생각처럼 녹록지 않다. 실제 사회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내는 시스템은 스페인 영화 ‘더 플랫폼’(2019) 속 수직 감옥 형태와 유사하다. 고층의 사람이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저층은 함께 끼니를 해결할 수도, 당장 오늘의 생명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 저층민의 생존이 고층민의 의지에 달린 셈인데, 이 과정에서 언제나 먼저 발현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턱없이 결여된 인간성이었다. ‘더 플랫폼’과 ‘더 에이트 쇼’는 사회의 양극화와 수직적 계층 사회를 여러 메타포로 화면에 노골적으로 옮겨놓았다.

‘더 에이트 쇼’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벼랑 끝에 몰린 ‘3층’ 역 류준열, 자유로운 영혼 ‘8층’ 역 천우희, 브레인 ‘7층’ 역 박정민, 기회주의자 ‘4층’ 역 이열음,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6층’ 역 박해준, 불의를 참지 못하는 ‘2층’ 역 이주영, 평화주의자 ‘5층’ 역 문정희, 묵묵히 자신의 몫을 찾는 ‘1층’ 역 배성우까지. 시청자는 흡사 롤플레잉 게임에 임하는 것처럼 누군가에 몰입해 작품에 쉬이 빠져들 수 있다.

화면 비율과 질감의 변화를 통해 ‘쇼’와 현실을 정확하게 구분 짓던 작품은 점점 진짜와 가짜, 쇼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는 점점 우리에게도 짙은 혼란을 부여한다. 서스펜스와 스릴러가 진득하게 들러붙은 이 참혹한 ‘더 에이트 쇼’가 과연 TV 속의 세상인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 현실의 풍경 그 자체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평등한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계급에 갇혀 이동조차 제한된 폐쇄적인 계층 사회인가.


필자 박현민은 잡식성 글쓰기 종사자이자, 14년 차 마감 노동자다. 가끔 방송과 강연도 하며, 느려도 밀도 높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나쁜 편집장』을 포함해 총 3권의 책을 썼다.
필자 박현민은 잡식성 글쓰기 종사자이자, 14년 차 마감 노동자다. 가끔 방송과 강연도 하며, 느려도 밀도 높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나쁜 편집장』을 포함해 총 3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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