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칙왕과 팀킬

입력 2024. 04. 24   15:39
업데이트 2024. 04. 2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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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민 서울신문 문화체육부 전문기자
홍지민 서울신문 문화체육부 전문기자



스포츠에서 ‘반칙왕’을 이야기할 때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는 아폴로 안톤 오노다. 2000년대 초반 미국 남자 쇼트트랙의 에이스였다. 그가 반칙왕으로 각인된 건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때다. 당시 13바퀴 반을 도는 남자 쇼트트랙 1500m 결승에서 한국의 김동성이 7바퀴를 남기고 치고 나가 선두를 끝까지 유지하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하지만 김동성은 실격 판정을 받고 금메달을 놓쳤다. 마지막 바퀴 코너를 돌 때 김동성을 뒤따르던 오노가 안쪽으로 파고들다가 주춤거리며 마치 접촉이 있었던 것처럼 동작을 취했는데, 김동성이 오노의 인코스 진입을 막았다는 황당한 판정이 나온 것이다.

나흘 전 남자 쇼트트랙 1000m 결승에서도 중국 리자쥔과 충돌해 넘어지다가 안현수까지 넘어뜨리며 금메달을 무산시켰던 오노는 단숨에 ‘국민 밉상’이 됐고, 그의 ‘할리우드 액션’은 지금도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오노가 반칙왕의 대명사라면 같은 편에 해를 끼치는 ‘팀킬’의 대명사로는 토냐 하딩이 생각난다. 하딩은 1990년대 초반 낸시 캐리건과 함께 미국 여자 피겨스케이팅을 대표하는 선수였다. 세계 여자선수로는 두 번째, 미국 여자선수로는 최초로 고난도 점프인 트리플 악셀을 성공하기도 했다. 하딩은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미국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출전 직전 괴한에게 둔기로 가격당해 무릎을 다친 캐리건은 출전을 포기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후 하딩은 피습사건을 사주했다는 의혹에 휩싸인다. 우여곡절 끝에 출전한 올림픽에서 하딩은 8위에 그치고 부상에서 회복한 캐리건은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하딩은 미국 피겨계에서 영구 제명되며 비뚤어진 경쟁심의 표본으로 남게 됐다.

새삼 오노와 하딩을 떠올린 것은 최근 한국 쇼트트랙에서 ‘팀킬’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남자 쇼트트랙에서 황대헌이 대표팀 라이벌 박지원에게 여러 차례 반칙을 저지르며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지난해 10월 월드컵 1차 대회 1000m 2차 레이스 결선에서 박지원을 뒤에서 밀치며 실격당한 황대헌은 올해 3월 차기 시즌 국가대표 자동선발권이 걸린 세계선수권대회 1500m와 1000m 결선에서도 박지원을 손으로 밀거나 당겨 실격됐다. 황대헌의 반칙에 한국 남자 쇼트트랙은 금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하고 5000m 계주 은메달만 들고 돌아왔다. 대회 직후 황대헌은 “절대 고의로 그런 건 아니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지난 6일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박지원과 또 충돌했다. 111.12m의 트랙을 도는 쇼트트랙은 기본적으로 4명, 많게는 10명이 동시에 경주를 펼치기 때문에 기록보다 순위 싸움이 중요하고 선수 간 접촉이 불가피하다. 신경전도 그만큼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 접촉을 피해 살살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반칙이 반복되자 고의성 논란도 일고 있다. 일각에선 기술보다 힘으로 경기를 치르는 황대헌의 스타일을 지적하기도 한다. 같은 대표팀 내에서 일어난 볼썽사나운 모습에 국민 시선은 더욱 곱지 않다. 한국 쇼트트랙이 고질적인 파벌 다툼에 성폭행사건, ‘고의충돌 의혹’으로 뭇매를 맞던 게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과도한 승부욕과 경쟁심은 결국 황대헌에게 ‘국가대표 탈락’이라는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중국 선수들의 반칙과 편파 판정으로 얼룩진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당시 쇼트트랙 남자 1500m에서 무한질주로 금메달을 따내며 국민의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었던 황대헌이라 이번 사태가 더욱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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