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고민은 행복만 늦출 뿐

입력 2020. 07. 02   13:49
업데이트 2020. 07. 02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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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국방부 양성평등 실천 우수사례 공모전 최우수작
  
 

곽동현 해군대위 국군복지단
곽동현 해군대위 국군복지단

  

‘그 어느 것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밤늦게 퇴근해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의 감은 두 눈을 보는 것도, 기다림에 지친 얼굴로 반겨주는 아내를 대하는 것도, 지친 몸을 이끌고 안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그 어느 것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동이 트지도 않은 새벽녘 출근을 위해 졸린 눈을 떠 무거운 숨을 내쉬며 세수를 하고, 내 숨보다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옷을 입고, 그 옷의 무게보다 더욱 육중하게 느껴지는 우리 집 대문을 밀고 나서며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여전히 자고 있는 아이와 그 옆에서 꼭 붙어 자는 아내의 모습이 마냥 이쁘게 만은 보이지 않는 날들이 늘어났다.

나는 지쳐있었다. 분명히 지쳐있었다.

결혼식을 올린 지 이제 막 3년이 되었지만 그새 우리 가족은 4번이나 관사를 옮겨 다녔다. 2번째 관사를 받았을 때 태중에는 첫째 아이가 있었다. 제주에서 뭍으로 넘어오는 이삿짐은 파도의 힘을 온전히 버텨내질 못했다. 신혼 가전이라 더욱 애착을 가졌던 냉장고는 문이 파손되고, 결혼한다고 큰맘 먹고 장만했던 옷장은 옆구리가 터져버렸다. 내 마음이 상함은 물론이요, 임신 초기 아내의 마음은 어떠하였으랴. 3번째 관사를 받았을 때는 첫째 아이가 태어났고 아직 혼자 힘으로는 뒤집지도 못하던 때였다. 산후에 몸도 성치 않은 아내를 데리고 또 억지로 이사를 했고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에 미안한 마음은 무뎌지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기적이었고, 나 아닌 타인의 힘듦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년에 한 번씩 이사하며 ‘부부라면 응당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곧 죽어도 같이 살자고 다짐했지만 늘 관사는 다음 부대에 전출을 가고 나서야 나왔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혼자서 살아야 하는 시간이 생겨났다. 며칠 혹은 몇 주 만에 보는 아이는 볼 때마다 부쩍 자라있었고, 아내의 손은 점점 거칠어져만 갔다.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사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출근이 빨랐고, 퇴근이 느렸다. 가족을 만나는 시간은 하루 중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건 볼 때마다 부쩍 자라는 아이도 아니었고, 거칠어 가던 아내의 손도 아니었다. 나를 보면 피하거나 울기 시작하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곽동현 대위와 딸이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필자 제공
곽동현 대위와 딸이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필자 제공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아이를 출산하고,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오직 딸만 바라본다는 ‘딸바보’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를 출산하고 반년이 지난 당시의 나는 정말 ‘딸 바보’가 되어있었다. 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퇴근 후 나는 그저 피곤하기만 했고, 나를 보면 울며 피하는 아이 모습에 서운함만 느꼈다. 나는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진급하는 것이 진정 가족을 위하는 길이라는 어느 선배의 말처럼 그저 해군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했을 뿐이다. 그게 정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이러지, 도대체 왜 아이는 나를 보면 피하는 걸까. 이대로 계속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무언가 과감하게 선택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러던 중 나는 인터넷에서 아래의 짧은 글귀를 보고 더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대한 확신이 들었고, 그런 이유로 나는 육아휴직을 결심했다

‘10년 후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늘의 행복이라고 믿기에, 현재는 중요한 순간이 아니라, 유일한 순간이라고 믿기에 이 회사를 떠나고자 합니다.’

나는 되려 이렇게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결심은 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나는 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본부에서 근무 중이었고, 소령 진급 심사를 1년 앞두고 있었다. 나는 걱정했다. 그간 쌓아왔던 경력 때문에 더욱 그러하기도 했다. 당장에 만류하는 사람도 많았다. 대게는 나의 진급을 걱정하였고, 일부는 10년의 군 생활을 했던 나에게 감히 육아가 쉬운 일이 아님을 걱정해주었다. 인터넷에 육아휴직을 검색하면 부정적인 의견들이 주로 나온다. 정말 겪었던 사람들의 경험담인지, 해보지는 않고 겁부터 내는 사람들의 냉소 섞인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복귀하면 자리 없으실 거에요’, ‘육아휴직 수당으로는 살림이 빠듯해요’, ‘진급은 끝이라고 봐야겠네요’, ‘육아휴직은 여자만 쓰는 거예요’ 등등 나의 마음을 다잡기에는 부족한 의견들이 대부분이었다.

고민의 시간은 깊어만 갔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고 마음속으로는 떠들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그렇듯 나도 77억 세계인구 중 고작 한 명의 구성원일 뿐이고 육아휴직을 하면 나 하나쯤 잊히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육아휴직을 위한 난관은 끝을 몰랐다. 육아휴직을 한다 해도 경제적인 것이 문제였다. 언젠가 할 육아휴직을 위해서 돈을 모아놓았던 것도 아니었고 그달의 월급이 그달의 생활비가 되는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또한, 육아휴직은 나만 결심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내에게 내 결심을 전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를 의지하고 계시는 부모님과 장인어른, 장모님까지 설득을 해야 했고 그 점에서 나는 여전히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관학교에 합격했다며 그렇게 좋아하셨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 같아 마음 한쪽이 계속 불편했고 장인어른, 장모님께는 당신의 귀한 따님을 걱정 없이 살게 해주겠노라고 약속했기에 자칫 책임감이 없는 사위로 보일 까 두려웠다.

과장님과 병과장님께 보고했을 때 무슨 답변이 돌아올지도 의문이었고, 실제로 보고드리는 것도 입술이 덜덜덜 떨릴 만큼 쉽지 않았다. 다행히 흔쾌히 승인을 해주셨고 후임자를 선정하는 과정까지 진행되었다. 부모님께서는 ‘네가 얼마나 고민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않겠다’고 하시며 되려 날 걱정해주셨다. 장인어른께서는 야전은 물론 연합사를 포함하여 두루 요직을 거쳐 중령으로 전역하셨고 장모님은 그런 남편을 내조하시며 30여 년을 살아오셨다. 그 누구보다 군 생리에 대해 잘 아셨고, 지금보다는 당시의 군 문화가 익숙하신 분들이셨기에 육아휴직을 더욱 반대하실 거로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육아휴직을 하겠다는 말에 장인어른의 대답은 이렇게 돌아왔었다. ‘난 또 표정이 하도 심각하길래 전역한다는 줄 알았네,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알겠다. 이왕 육아휴직을 하기로 한 거 귀중한 시간 보내라’

아내는 당장 생활비가 걱정이었고 나아가 나의 향후 군 생활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나는 아내에게 이제 더 이상 그런 옛날 군대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물론 나도 경제적인 부분이 걱정이 안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100여만 원의 수당으로는 3인 가족이 살기 빠듯할 거라 예상했다. 아쉽게도 예상이 빗나가지는 않았지만, 아예 못살 정도는 아니었다. 소비를 최소화하고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갔다. 아이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지만 돈을 버는 것보다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정서적으로 더욱 도움이 될 것이라 위안을 삼았다.

이로써 모든 설득을 끝이 났고 그렇게 나의 육아휴직은 시작되었다.

간밤에 잠을 자고 눈을 떴는데,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휴일과는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 느낌이 묘했다. 사관학교 하계, 동계휴가 이후 그렇게 긴 휴직은 처음이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이런 삶이 낯설긴 했지만 금방 적응했다. 육아휴직 기간은 지금까지의 생활과는 또 다른 삶이었다. 생전 만들어 보지도 않던 이유식도 만들고 기저귀도 갈았다. 낮잠도 재우고 목욕도 꼬박꼬박 시켰다. 의욕은 왕성했고, 하루가 멀다고 외출을 나갔다. 아내와 아이와 함께하는 평일 데이트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육아휴직 이전의 주말은 달력에도 빨갛게 색칠되어 있듯 나에게는 강렬하게 쉬는 날이었다. 주중 업무에 지쳐있던 내 육신을 쉬게 해주는 날이었고, 여느 가정과 다름없이 오랜만에 쉬는 날이니 외출을 나가자는 아내 의견과 집에서 좀 쉬자는 내 의견이 서로의 기세를 꺾지 못하고 아웅다웅 다툼하는 날이었다. 가끔 나가기라도 하면 북적거리는 인파에 뭐 하나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또다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육아휴직은 선택하고 나서의 주말은 달랐다. 주말은 온전히 집에서 쉬면서 평일 외출을 위한 에너지를 모았다. 평일에 외출을 나가면 한가하다. 아기가 넓은 잔디에서 뛰놀아도 부딪힐 인파가 없고, 박물관도 도서관도 여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마트를 가도, 카페를 가도, 어디를 가도 여유로웠고 그 여유로움이 행복을 데리고 왔다. 아이는 즐거워했고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 행복했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의 모습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뒤집기를 하던 아이는 어느새 혼자서 일어나더니 급기야 걷기 시작했다. 아장아장이라는 표현이 이래서 만들어졌구나 싶을 정도로 걷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나만 보면 울고 피하던 아이는 어느샌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항상 가정을 향해 걸어간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이켜보면 아니었다. 나의 걸음은 나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지 아내와 아이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육아휴직을 선택하고 난 후의 나의 걸음은 정말이지 아내와 아이를 향해있었고, 아내와 아이의 걸음은 또한 나를 향해있었다.

함정에서 근무할 때에는 많은 병사와 함께였다. 주로 조리병들이었고, 이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 식사부터 시작해 야식이 끝날 때까지 쉴 틈 없이 근무했었다. 조리, 배식, 설거지, 조리, 배식, 설거지가 계속 반복되는 업무였지만 이들의 업무에 대해 칭찬해주는 이는 드물었다. 수십, 수백 명의 입맛을 다 맞출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같은 음식에도 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싱겁다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고 그만큼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병사들의 화상, 습진 등은 생활이었고 가끔은 몸살과 고열, 훈련 중 부상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근무를 했다. 본인 한 명이 빠지면 승조원의 배식에 문제 생길 것 같다는 끝도 모를 책임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일종의 무책임한 책임감은 되려 다른 조리병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다음 업무를 위해서는 반드시 쉼이 있어야 하고, 지쳐가는 본인들을 지킬 그 무엇인가는 있어야 했지만, 내 선임은 다쳐도 근무했다는 이유로, 내 동기는 아파도 참고 근무했다는 이유로 그들은 아무리 아파도 다 참아냈고 이 때문에 업무효율은 급격히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또 새벽부터 일어나 일하고 있는 병사를 불러 이야기를 했다. “네가 지금 쉬지 않으면, 나중에 네 동기나 후임이 몸이 안 좋을 때 네 눈치를 본다고 아파도 말도 못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무엇이 정말 전우를 위하는 길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지금은 가서 쉬어라, 네가 지금 쉬어줘야 네 동기나 후임도 몸이 안 좋을 때 정말 편하게 쉴 수 있고 그래야 더 빨리 좋은 몸 상태로 근무할 수 있다.”

아마 육아휴직에 대해 숱한 고민을 하는 장병들이 많을 것이다. 문화의 변화는 나부터가 시작이다. 내가 육아휴직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눈치 본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 사람들을 보고 또 더 많은 사람이 육아휴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먼저 육아휴직을 쓰게 된다면? 그런 나를 보고 다른 사람들도 육아휴직을 쓰게 될 것이고 그것을 본 또 더 많은 사람이 쓰게 될 것이다. 문화는 이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본다.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귀한 지금의 나는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게 되었다. 그 에너지로 더욱 업무에 매진 중이다. 아내와 아이와의 관계는 전보다 훨씬 좋아졌고 지금은 정말 “딸바보”가 되었다. 이제 아이는 나를 보면 쪼르르 달려온다. 아직 말은 못하지만, 볼에 뽀뽀해줄 정도는 된다. 이게 진짜 행복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육아휴직을 선택할 것이냐고 물어보면 나는 당연히 그러하겠다고 답할 것이다. 이 수기의 서론이 이렇게 긴 건 내가 육아휴직을 하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이 그만큼 길었기 때문인데, 다시 돌아간다면 고민도 없이 육아휴직을 할 것이다.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면 “고민은 배송만 늦출 뿐” 이라는 재밌는 말이 있다. 아무리 고민해도 어차피 구매하게 될 것이니깐 고민하지 말고 얼른 결제 버튼을 누르라는 말이다. 나도 육아휴직에 관해서는 같은 말을 하고 싶다. “고민은 행복만 늦출 뿐”

혹시 지금도 여전히 육아휴직을 고민 중이라면 이 글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 육아휴직의 소중함과 중요함을 느끼길 바라며 이 짧은 글을 마치려 한다.
  
“10년 후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늘의 행복이라고 믿기에, 현재는 중요한 순간이 아니라, 유일한 순간이라고 믿기에 육아휴직을 쓰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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