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통제권 전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

입력 2020. 05. 26   14:14
업데이트 2020. 05. 26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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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논단 1802호(한국국방연구원 발행)


   
김홍철
정치학 박사
goodpilot21@yahoo.com


전·평시 작전통제권 전환의 적절한 시점과 결정요소 연구는 최근 안보상황 변화에 따른 일시적으로 주목을 받는 것이 아니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 사령관에게 작전통제권이 이양된 이후부터 시작되어, 한미 간 전략적 이익의 변화, 국내 정책변경 등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논의되어 온 오래된 주제다. 이 글은 전·평시 작전통제권 전환에 분수령을 이룬 다섯 번의 역사적 계기를 살펴보고 정책적으로 중요한 함의를 찾아본 것이다. 한미동맹은 67년이라는 역사를 통해 수많은 제도적 장치들을 제공해 왔다. 이들을 통한 전작권 전환 추진이 한미 양국이 선호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임을 믿는다.
 


한미 국방부장관은 작년에 열린 51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 2019. 11. 16)에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위한 기본운용능력(IOC) 평가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보고, 2020년에는 완전운용능력(FOC)을 검증·평가하기로 결정했다. 1994년, 평시(이하 정전시) 작전통제권 전환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추진되어 온 전시 작전통제권(이하 “전작권”) 전환이 마침내 결실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북한이 지난해와 올해 초에 미사일과 방사포를 발사했다는 점, 당초 제시한 3가지 조건이 아직 충족되지 않았고, 북한의 핵능력과 주변국의 위협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지금 진행하는 전작권 전환 노력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평시 작전통제권 전환의 필요성과 시점에 대한 논쟁은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정전시 작전통 제권 전환이 이루어졌던 1994년, 또는 최근에 와서야 집중적으로 논의된 이슈가 아니라 6·25전쟁 당시 유엔군 사령관에게 작전지휘권이 이양된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후 한미 간 전략적 이익, 국내 정책 등 다양한 요인들에 영향을 받았지만, 환수에 지향점을 두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국과 미국 중 어느 한쪽이 제안한다고 기존 합의가 변경되거나 급조될 수 있는 정책이 아니란 점도 분명하다. 한미동맹과 연합방위태세를 유지하는 당사자들 간의 전략적 이익이나 입장을 제도적 장치인 회의체와 협의체를 통해 조율하고 합의해야 변경이 가능한 국가정책이기 때문이다. 시기를 중심에 놓던 것에서 벗어나 조건을 기초로 한 전작권 전환으로 방침을 변경한 것이 조율과 합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북한과 주변국의 위협, 남북 간 대화 추이와 비핵화 논의 진전 상황 등을 고려한 것이다. 전환 이후 한미의 지휘구조도 주도-지원의 병렬 관계였다가 미래사령부(Future Command)를 거쳐, 2018년에는 미래연합사(Future CFC) 형태로 바뀌었다.

작전통제권 전환 방향에 영향을 미쳤던 요소들이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들여다보는 것은 앞으로의 논의를 진전시키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이 글을 쓴 배경이다. 먼저, 6·25전쟁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과 미국의 작전통제권 전환의 방향이 바뀌었던 시기를 살펴본다.


작전통제권 전환 과정의 다섯시기


작전통제권 전환 과정의 다섯 시기 첫 번째 시기는 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한 6·25전쟁부터 닉슨 독트린과 카터의 주한 미군 철수 추진의 대안으로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된 1978년까지다. 두 번째 시기는 정전시 작전 통제권이 한국 정부로 전환된 1994년까지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의 스윙전략에 의해 주한미군 철수가 진행되고, 냉전 종식에 의해 넌-워너 수정안을 통한 해외 주둔 미군병력 감축과 구조개편이 제안되었던 시기다. 세 번째는 럼스펠드 독트린에 의해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가 이루어지고 주한 미군도 계속 감축되면서, 한미 양국이 전작권 전환 이행을 위한 전략적 전환계획(STP)을 수립하고 최초로 기본운용능력 검증(2009년)을 수행한 시기다. 네 번째는 2012년으로 결정되었던 전작권 전환이 2015년으로 연기되고, 중국의 급부상과 북한의 핵 위협 현실화에 따라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으로 정책이 변경된 시기다. 다섯 번째는 지금이다. 미국에 대한 중국의 도전 증가와 북한 핵·미사일의 미국 본토 위협 상황이 이어지고, 지휘구조를 미래사령부에서 현재의 연합사령부 체제를 유지하는 형태로 변경하면서, 합참의장이 미래사령관을 겸직하지 않는 것으로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환의 요인과 함의

지난 시기를 일괄해 볼 때 정책적으로 중요한 함의는 다음 세 가지일 것이다. 첫째, 작전통제권 전환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 변화에 대한 우리 대응 노력과 함께, 두 나라의 이견이 한미동맹을 통해 성숙된 제도적 장치들로 조정되어온 과정이라는 점이다.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 또는 감군을 고려한 상황은 첫 번째부터 세 번째 시기까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베트남전 이후 닉슨 독트린과 스윙전략의 시행으로 미국의 전략적 중심이 유럽과 중동으로 전환된 것, 냉전 이후 동아시아 전략 구상(EASI)을 새롭게 구상한 것,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을 동시 수행하면서 안보제공의 한계를 실감하여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GPR)를 추진했던 움직임과 맞물려 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섯 번의 시기에 걸쳐 동맹 방기로 여겨질 수 있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안보정책결정(주한미군 철군, 감군 등)에 대해 우리가 아무 준비 없이 요구를 수용하며 자율성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해결을 시도한 것은 아니란 점이다. 6·25전쟁 이후 미군의 감축은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전략에 따른 것이었고, 우리도 쉽게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도 이에 대한 대비를 위해 독자적으로 군사비를 증가시켜 왔다. 미군의 전략변화에 따라 주한미군의 단계적 감축이 이루어질 때마다(<그림 1> (a)), 국방비가 확연하게 증가해왔음을 실제 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그림 1> (b)의 파란색 원). 이뿐만이 아니다. 첫 번째 시기에서는 한미연합방위태세 강화를 위해 1976년부터 팀스피리트 등을 비롯한 한미 간 정기 연합훈련을 시행했고, 군사력 현대화 계획을 수립·시행해서 한국군의 전력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병행했다. 이후는 한미 연례 협의체(SCM, 1968년; 한미군사위원회의(MCM), 1978년)와 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 2003년), 안보정책구상회의(SPI, 2005년) 등 다양한 협의체를 신설하여 반복되는 북한의 위협에 대한 평가와 이에 대한 대비 방향을 주기적으로 논의할 수 있었다.

 (a) 주한미군 병력 변화
(a) 주한미군 병력 변화
 (b) 정부별 한국 국방비 증가율
(b) 정부별 한국 국방비 증가율
<그림 1> 주한미군 병력 변화 및 한국 정부별 국방비 증가율>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시기는 미국의 재균형 정책과 인도 태평양 전략에 맞물려 전작권 전환 과정이 이어졌는데, 한미 공통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연례 협의체(SCM, MCM 등)의 논의와 연합연습을 통해 실질적인 능력을 검증하면서 최적의 지휘구조를 찾는 것이 핵심이었다. 지금까지의 흐름은 이랬다. 먼저, ‘연합사 폐지와 주도-지원의 병렬형 지휘구조’가 논의되다가 천안함 폭침과 국내 반대여론을 고려하여 전작권 전환 시기를 연기하는 데 합의했다. 이후 북한 핵 위협이 고조되면서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으로, 지휘구조는 합참 내 ‘미래사령부(Future Command)’를 창설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최근에는 중국의 지역 패권 부상과 미 본토에 대한 북한 위협 고조 상황이 이어지면서 전작권 전환 조속 추진과 함께 양국이 동등한 역할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일 연합지휘구조로서 ‘미래 연합사령부(Future Combined Forces Command)’를 두는 데 최종적으로 합의했다.

한미동맹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우선순위는 냉전 종식, 중국의 부상과 북한 위협 등으로 바뀌어 왔는데, 이것이 작전통제권 전환을 가속화하거나 신중하게 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 성장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증강시키며 자주적인 대응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방향이었고, 미국의 전략 변화로 발생하는 이견들을 한미동맹에 의해 성숙된 제도적 장치를 통해 조율하며 작전통제권 전환 템포를 조절해왔다. 신뢰성 있는 제도(Institution)를 통한 협상으로 거래 비용을 낮추고, 서로 만족하는 결과(Parato Optimal Equilibrium)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작전통제권 전환은 국가안보와 연관된 사안으로 지도자의 성향과 무관하게 안보환경 변화에 지속적으로 적응해 나가면서 환수 모멘텀을 이어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닉슨 독트린에 대한 대응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연합사를 창설했고, 노태우 대통령은 전술핵 철수와 주한미군의 단계적 감축에 대응하기 위해 정전시 작전통제권 전환을 단행하면서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에 대해서도 준비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세계방위태세검토(GPR)에 의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비하기 위해 주도-지원의 전작권 전환에 합의했다.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은 중국의 급부상에 따라 미국이 아시아 중시 전략으로 회귀하고, 북한 핵·미사일 위협이 고조됨에 따라 시기를 연기했고,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으로 변경했다. 현 정부는 미국과 함께 북한 위협에 대한 맞춤형 억제전략을 구체화하면서도 비핵화를 유도하는 외교적·제도적 노력을 병행하면서 전작권 전환의 조속한 추진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처럼 작전통제권 전환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고도화로 전환 시기가 지연되거나 조건에 기초한 전환과 같이 수평적인 정책전환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환수의 방향으로 모멘텀을 가지고 진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지도자에 따라 국가안보 위협에 대응하는 전력과 방법이 항상 동일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북한 위협과 같은 안보환경 변화에 적극적으로 또는 보수적으로 대응하는 차이는 있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자나 정부의 성향에 따라 그 차이가 유의미할 정도로 있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전환을 위한 여건 조성과 단계적 환수라는 모멘텀이 역행되거나 중단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진보성향의 정부와 보수성향의 정부 간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진보정부가 작전통제권 전환에 더 적극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김대중 정부에서 전작권 전환에 대한 논의와 진전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전략적 이익 변화와 북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독자적인 국방력 건설에 노력했다는 측면에서는 이전 모든 정부가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림 1> (b)에 나타난 바와 같이 노무현정부와 문재인정부는 국방비를 연 7~8% 이상 증가시켰다. 이전 정부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두 정부가 전작권 전환을 자주국방의 중요한 상징 또는 선결조건으로 인식했다는 점일 것이다. 상수로 여겨져 온 북한의 위협을 억제하기 위한 핵심군사능력 확보와 더불어 남북대화, 6자회담, 양자·다자간 협력 등과 같은 외교적인 노력을 강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좀 더 들여다보자. 노무현 행정부는 ‘제2차 북핵위기’ 상황에서 6자회담이라는 제도적 틀을 활용하여 2005년에 9.19 남북 공동성명을 이뤄냈고, 남북대화와 수차례의 6자회담을 통해 2007년의 2.13합의와 10.4 남북공동성명 등으로 긴장을 완화하면서 전작권 전환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현 정부 초기부터 북한이 6차 핵실험과 화성-12, 14, 15형과 같은 IRBM과 ICBM을 여섯 차례 발사하는 등 위협을 고조시켰지만, 남북대화와 북미대화라는 외교적 접근방식으로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과 ‘9.19 남북군사합의’를 이끌어냈다. 군사적 긴장 완화와 비핵화 노력이 전작권 전환의 배경이 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접근이 아직까지는 가시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다소 답보 상태에 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북미회담이나 남북회담 등을 통해 북한 비핵화를 기대하는 것 이외에는 전작권 전환에 우호적인 여건을 조성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환 모멘텀을 유지하며 외교·군사적 이중(Two-Track)접근 방식이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비핵화의 기대효용성 (Expected Utility)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고안하고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포함해서다.

셋째, 두 나라 간의 군사력, 경제력, 민주화 수준의 간극이 줄어들면서, 서로의 의견이 반영되고 선호하는 방향으로 작전통제권 전환과 지휘구조 논의가 발전되어 왔다는 것이다. 군사·경제적 능력 측면에서 심한 비대칭 상태로 출발하는 동맹은 모로우(Morrow)의 안보-자율성 거래 모델이 예상하는 바와 같이 강대국의 요구에 의해 약소국의 자율성이 제한되는 것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약소국의 능력이 발전한다고 해도 강대국과의 격차가 심하다면 이와 같은 현상은 지속될 수 밖 에 없다. 그러나 동맹이 장기간 지속되어 방기(Abandonment)에 대한 의심이 사라질 정도로 신뢰가 쌓이고, 약소국의 능력이 강대국에게도 필수적인 수준으로 성장한다면 상대보다 더 많은 것을 취하려고 하는 것보다 서로가 일정한 수준의 이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동맹관계가 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도와 신뢰를 바탕으로 장기적 효용성을 높일 수 있게 협상이 타결될 개연성이 높다. 여기에 양국의 민주화 수준이 유사하다면, 협상실패에 따른 청중 비용(Audience Cost)을 서로 잘 알기 때문에, 이해가 상충되어도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균형점에 도달하려고 노력할 가능성이 높다.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한 6·25전쟁 당시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 순위는 세계 최고다. 한국의 경우는 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 초까지 미국으로부터 군사·경제원조를 받았다. SIPRI(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가 작성한 자료를 기준으로 1953년 한국의 군사력 순위는 현재의 국가 수로 환산할 경우 대략 107위 수준에 있었다. 이후 미국은 변함없는 선두였고, 한국은 1978년에 20위, 1994년 10위, 현재는 대략 세계 7~10위권까지 발전했다는 평가다. 경제력을 보자. World Bank 자료에 나타난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미국은 줄곧 선두다. 한국은 1953년에 세계 61위 수준에 있었으나 1961년까지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 나쁜 상황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다가 1978년에는 37위 수준까지 발전했고, 1994년 14위, 현재는 15위에 위치해 있다. 다른 요소들까지 고려하면 세계 10위권까지 성장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그림 2> 한국과 미국의 군사비 지출 및 GDP 세계 순위 변화  
 
한국의 군사·경제력이 발전하여 미국과의 격차가 줄어든 것은 작전통제권 전환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먼저 1978년 연합사 창설의 경우를 살펴보면, 당시 미국의 닉슨독트린 등과 같은 미국의 전략적 이익 변화로 7사단과 상당수의 주한미군이 철수되며 한반도에서 전력 공백이 발생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방위역량은 1960년대 초부터 계속되어 온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군사력 현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었다. 1972년 한국전 참전 유엔국가 중 마지막으로 태국군이 철수함에 따라 유엔군에는 미군만 남게 되었고, 1976년 8.18 사건을 겪으며 미군 위주 유엔군사령부의 작전통제권 행사에 문제를 인식하여 한국군의 역할을 강화한 한미연합사령부의 창설을 결정하게 되었다. 냉전 이후 미국의 주한미군 단계적 철수 이전부터 노태우 정부는 선거공약의 하나로 작전통제권 전환을 천명했을 정도로 군사력과 경제력이 크게 도약해 있었다. 2004년 미국이 해외주둔군을 재배치할 때는 독일, 일본과 함께 한국의 평택(Camp Humpreys)을 주요 주둔지로 지정할 정도로 동맹의 지위가 격상되었다. 2008년 이후부터는 주한미군의 병력 숫자가 28,500명 수준으로 고정되 어 12년간 유지되고 있다. 이는 안보환경의 변화에 대한 한국군의 대응능력이 충분하여 미군의 급격한 변화가 불필요하다는 것이고, 변화에 긴급하게 요구되는 군사력의 확충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한국의 경제력이 충분하다는 것이며, 한미 간 협의 결과가 이상 없이 지켜질 정도로 동맹의 신뢰성과 투명성이 높아져 전작권 전환을 위한 여건이 충분히 성숙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울러, 2002년 ‘효순·미선사건’으로 이루어진 SOFA 개정은 미국이 민주화된 한국의 여론을 중요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한미 간 국방정책 결정은 보다 합리적이고 신중해졌다. 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 발전, 민주화의 진전은 미국으로 하여금 자율성을 침해하는 정책의 강행을 제한함과 동시에, 한국 방위를 분담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2006년에 시작된 전작권 전환 협의는 과거와는 다르게 한미 간 협의체와 회의체를 통해 서로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된 상태로 진행되고 있다. 북한과 중국의 위협 등을 고려, 전작권 시기 연기, 방식의 전환, 지휘구조의 변화 등 다양한 의견들이 소통되고 있다.

<그림 3> 민주화 지수와 세계 자유 지수
   
Economist Intelligence Unit(EIU)에서 매년 발표하는 민주화 지수를 보면, 한국과 미국이 2010 년을 기점으로 거의 유사해졌고, 2017년 이후에는 한국이 더 앞선 것으로 나타나 있다(<그림 3> (a)). <그림 3> (b)에서 보듯이 언론자유 정도를 보여주는 프리덤 하우스 지수(Freedom House Index)도 2012년 이후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앞으로 국민과 언론의 관심과 감시가 철저해지고, 한미 간에 균형적이지 않은 정책을 결정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심각한 청중 비용을 초래할 개연성이 더 커질 것이다. 전작권 전환의 추진 관성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며, 갑작스러운 중단이나 어느 한쪽에만 유리한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귀결되는 것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작권 전환은 한미가 동등한 입장에서 동맹의 이익 극대화 또는 최적화를 달성하는 방향으로 진화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본다.
  
맺음말    

작전통제권 전환은 한반도의 안보를 한국군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의지의 구현이자,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국력과 위상에 부응하는 것이다. 향후 한미동맹을 상호보완적이며 미래 지향적으로 진화 발전시키는데 분수령 역할을 할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현 정부는 전작권 전환을 국정과제로 선정했고, ‘굳건한 한미동맹 기반 위에 전작권 조기 전환’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2014년에 한미가 합의한 내용에 조건 및 검증평가 절차를 거친다는 거시적인 틀에는 바뀐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 연합사 구조를 유지하되 한국군 4성장군이 지휘하는 미래 연합사(Future CFC) 체제로 전환하고, 합참의장이 미래 연합사령관을 겸직하지 않도록 한 것, 연합사의 캠프 험프리스 이전 등의 중요한 변화사항을 포함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전문가와 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휘구조의 특성과 영향요소 등에 관한 논의가 매우 활발하다. 벨, 샤프 등 전 한미연합사령관들과 클링너(Bruce Klingner), 스나이더(Scott Snyder), 오핸른(Michael O‘Hanlon) 등 유명 인사들이 논의에 적극적인 것도 눈에 띈다. 미국에게 는 한국군 부대에 대한 모든 통제를 한국 정부에 이양하고, 미래연합사 체제를 통해 한국군 4성장 군에게 미군이 어디까지 지휘를 받아야 하는지를 제도적으로 약속하는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관심이 높다. 미국이 추진하는 세계전략과의 연계성뿐 아니라 자국 내의 여론을 고려해야 하는 민감한 내용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국내에서는 한미동맹 재단과 일부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이에 관한 연구가 매우 부족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관심을 갖기를 희망한다.

2009년 이후 10년 만에 긴 휴면기를 벗어나 작년에 전작권 전환을 위한 기본운용능력(IOC) 검증 평가를 다시 실시했다. 이제는 역사상 최초의 완전운용능력(FOC) 검증을 앞두고 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접근방식이 있겠지만, 한미 양국이 위협을 같이 인식하고 신뢰와 동맹의 정신이 투영될 수 있는 제도를 기반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미동맹은 67년이라는 역사를 통해 수많은 제도적 장치들을 제공해 왔다. 이들을 통한 전작권 전환 추진이 한미 양국이 선호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도록 안내할 것임을 믿는다.
 

※ 본지에 실린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본 연구원 등 기관을 대표하는 공식적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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