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탄 들고 적 진지 육탄 돌격 죽겠다는 마음 아니면 이길 수 없었다”

입력 2020. 02. 04   16:46
업데이트 2020. 02. 0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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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영웅을 찾아서] 최득수 이등상사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7사단 입대
1953년 선우고지 탈환 참전
특공대 조장으로 30명 특공대원과
죽음 불사한 투혼 불살라 

 
“아군 1300여 명 전사할 만큼 치열”
고지 탈환 공로 인정받아
1954년 병사 출신으로 태극무공훈장 

 

‘살아있는 전설적 전쟁영웅’으로 불리는 최득수 옹이 6·25전쟁 당시 전투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살아있는 전설적 전쟁영웅’으로 불리는 최득수 옹이 6·25전쟁 당시 전투경험을 들려주고 있다.

훈장은 국가나 사회에 공로가 뚜렷한 사람에게 국가에서 그 공적을 표창하기 위해 수여하는 표장(標章)이다. 그중에서 무공훈장은 전시 또는 국가비상사태 때 혁혁한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한다. 무공훈장 수상자를 흔히 우리는 전쟁영웅이라고 부른다. 2020년 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이에 국방일보(국방저널)는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와 공동으로 매달 6·25 전쟁영웅을 찾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앞장서 싸운 이들의 애국심과 투혼을 기리고자 한다. 첫 회의 주인공은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한 최득수 이등상사다.

글=정호영/사진=양동욱 기자 

 

육군부사관학교에 세워진 최득수 옹의 흉상.
육군부사관학교에 세워진 최득수 옹의 흉상.

인천 수봉공원에 세워진 무공수훈자 공적비에 최득수 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인천 수봉공원에 세워진 무공수훈자 공적비에 최득수 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최득수 옹이 과거 전쟁 당시 군복을 입고 찍은 빛바랜 사진들을 손바닥에 펼쳐 보이고 있다.
최득수 옹이 과거 전쟁 당시 군복을 입고 찍은 빛바랜 사진들을 손바닥에 펼쳐 보이고 있다.

올해는 남북한이 총부리를 맞대고 싸웠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6·25전쟁의 의미와 교훈은 그동안 숱하게 언론에서 다뤄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전쟁을 직접 치른 당사자, 특히 전장의 영웅에 대해 심층 조명하고 싶었다. 이러한 기획 의도를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홍보 관계자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무공수훈자회에서 첫 번째 주인공으로 추천한 분이 바로 병사 출신으로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한 최득수 이등상사였다.

가슴이 뛰었다. 우리나라에는 총 다섯 가지 종류의 무공훈장이 있는데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인헌무공훈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무공훈장 중에서 최고의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병사 출신으로 받고 유일하게 생존한 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기자는 7년 전인 2013년 7월 24일, 육군7사단에서 열린 정전 60주년 425고지 전투전적지 방문행사 때 최득수 옹을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다. 당시 최옹은 7사단 출신 참전용사로서 7사단에서 근무 중인 손자(최승호 일병)를 현지에서 만나 화제가 된 바 있다.

기자는 전화 통화 후 인천의 한 아파트에서 아들과 사는 최옹을 찾아갔다. 올해로 93세(1927년생)인 최옹은 건강한 모습으로 기자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최옹은 기자를 오래전 본 적이 있었는지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국방일보에 대해 남다른 친근감을 나타냈다.

그동안 국방일보에서는 몇 차례 최옹을 인터뷰한 적이 있고, 그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거실 중앙의 액자에는 지난 2015년에 실린 국방일보 조용학 기자의 ‘무한공감’ 기사가 담겨 있었다. 또한 그의 낡은 앨범에는 올 초 서욱 육군참모총장이 보낸 연하장을 비롯해 역대 참모총장과 군 고위 관계자들이 보낸 각종 카드와 오래전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 등이 꽉 채워져 있었다.

최옹은 우리 국군 역사에서 ‘살아있는 전설적 전쟁영웅’으로 불린다. 현재 육군부사관학교와 육군1사단, 육군7사단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부사관학교의 경우 최득수 명칭을 사용하는 대대와 도로가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에서 그가 받은 태극무공훈장의 가치는 그 어떤 찬사도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나라를 구한 최고의 전쟁영웅이기 때문이다.

최득수 옹은 1927년 경기도 부천군 영종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방 이후에는 대한청년단에 가입해 인천지구 훈련대장과 감찰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최옹은 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피난을 못 가 이곳저곳에 숨어지내야만 했다. 다행히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이 수복되자 지원병 모집에 자원했다. 그리고 미군 화물선을 타고 부산에 내려가 훈련을 받은 뒤 국군(1951년 1월)이 됐다.

최옹이 처음 배치받은 부대는 국군7사단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7사단의 주요 전투는 모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중 대표적인 전투가 휴전을 한 달 정도 앞둔 1953년 6월 벌어진 강원도 양구의 938고지(일명 선우고지) 탈환전이었다.

“938고지를 선우고지라고도 부르는데, 당시 대대장이었던 선우 소령이 그곳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선우고지라는 명칭이 붙은 거예요.”

최옹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중공군과 치열한 고지 공방전을 벌인 탓에 아군 1300여 명이 전사할 만큼 고지 탈환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상했다. 이때 최득수 당시 이등상사(소대장 대리)는 특공대 조장으로서 30명의 특공대원들과 함께 수류탄을 들고 적 기관총 진지로 육탄 돌격했다. 아군의 고지 탈환은 이들의 죽음을 불사한 투혼이 결정적이었다.

“특공대원 중 5명만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어요. 죽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코 이길 수가 없어요. 오직 싸워 이겨야만 자신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최옹은 고지 탈환 전공을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뒤 1954년 6월 25일에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77호)을 받았다. 이후 1955년 4월 8일 이등상사 계급으로 전역했다.

6·25전쟁 무공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부사관과 병사는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다. 그나마 대부분은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우고 전사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생존한 병사 출신은 모두 3명이고, 현재까지 살아있는 분은 최득수 옹이 유일하다.

“전쟁터에서 지휘관의 명령은 설령 그것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따라야만 해요. 그것이 군인이고, 기강이 엄격한 부대만이 승리할 수 있어요.”

최옹은 인터뷰를 마치자 휠체어를 타고 병원(인천보훈병원)으로 향했다. 거동이 불편한 고령의 나이에 지병이 있어 가족들은 처음엔 인터뷰를 만류했다. 하지만 최옹은 국방일보를 통해 장병들을 만나고 싶어 했고, 인터뷰 내내 무공수훈자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조국을 위한 당신의 헌신, 대한민국은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병원문을 들어서는 최옹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기자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태극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 대한민국의 무공훈장


지금까지 교부된 훈장 총 21만2000여 개 태극무공훈장 1호 주인공은 '맥아더 원수'


무공훈장은 전투에 참가해 뚜렷한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으로, 태극·을지·충무·화랑·인헌무공훈장의 5등급으로 구분된다.

1950년 10월 18일 제정, 공포된 대통령령에 의해 처음에는 1∼4등 무공훈장으로 구분됐던 것이 1951년 5월 21일 태극·을지·충무·화랑무공훈장으로 변경됐고, 각 등급마다 금성·은성을 붙여서 수여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1963년 12월 14일 ‘상훈법’이 제정되면서 기존의 4등급에 인헌무공훈장이 추가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교부된 무공훈장은 총 21만2000여 개로 태극 409개, 을지 3191개, 충무 2만558개, 화랑 17만3939개, 인헌 1만4882개다. 이 중 6·25전쟁 당시 육군에 발급된 16만3000여 개의 훈장 중 아직도 5만4000여 개의 훈장이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육군본부는 ‘6·25전쟁 무공훈장 찾아주기 태스크포스(TF)’를 중심으로 무공훈장 찾아주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된 ‘태극무공훈장부’에 의하면,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은 6·25전쟁 중 191개가 수여됐는데 유엔군이 117개를 받았고 국군이 73개, 경찰관이 1개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유엔군이 태극무공훈장의 60% 이상을 받은 것은 그만큼 6·25전쟁에서 유엔군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말한다.

태극무공훈장 제1호의 주인공은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 원수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 후 1950년 9월 29일 열린 서울 환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에게 1등 무공훈장(현재의 태극무공훈장) 제1호를 수여했다.

태극무공훈장을 두 개 받은 대한민국 군인도 12명이나 된다. 모두가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 그리고 육군의 사단장 이상을 지낸 장군들이다. 육군에서는 정일권·백선엽·이형근·유재흥·송요찬·장도영·강문봉·김용배·임부택 장군 등 9명이고, 해군에서는 총장을 지낸 손원일 제독, 공군에서도 총장을 지낸 김정렬 장군, 그리고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신현준 장군이다. 그들은 전쟁 기간 내내 참모총장 및 주요 지휘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하며 조국을 위기에서 구했다. 가장 최근에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인물은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이다. 그는 6·25전쟁 발발 전인 1949년 있었던 몽금포 기습작전의 전공이 인정돼 지난 2016년 뒤늦게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국군 중에는 부사관과 병사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우고 전사했다. 전선을 지키고 전우를 구하려다 장렬히 산화한 이 땅의 진정한 전쟁영웅들이다.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부사관 및 병사는 17연대의 김용식·홍재근 이등병, 7사단 5연대의 김옥상 일등병, 6사단의 안낙규 이등상사(현재 중사), 수도사단의 백재덕 이등상사, 7사단의 최득수 이등상사, 3사단의 이명수 일등상사(현재 상사) 등 7명이다.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하두철 조직국장


정호영 기자 < fighter7@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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