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부 기고] ‘70’과 ‘50’

입력 2019. 08. 13   15:47
업데이트 2019. 08. 1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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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창 부 공군사관학교 군사학과 교수·중령
강 창 부 공군사관학교 군사학과 교수·중령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 광복절 새벽에 ‘공군의 아버지’ 최용덕(1898∼1969) 장군평생 조국과 공군만을 가슴에 품었던, 고단하지만 극히 명예로운 삶을 마감했다. 17세에 ‘국토광복’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대한독립청년단, 의열단, 신의단, 한교동지회 등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무장독립운동의 길과 항공력의 위력을 확신했던 그는 중국 여러 군벌의 항공군과 중화민국 공군에서 활약하는 과정에서 일찌감치 공군을 갖춘 새로운 조국을 꿈꿨다. 1943년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군설계위원회’는 바로 그러한 꿈 꾸기의 결과였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유보됐던 공군 건설의 꿈은 해방공간에서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그는 한국항공건설협회 초대 회장으로서 해방공간에서 사분오열돼 있던 항공인들을 결집했다. 또 이등병 신분으로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해 미국식 교육을 새롭게 받으라는 미 군정의 요구에 동요하며 주저하던 후배 항공인들에게는, ‘공군 창설’이라는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백의종군 정신’이 필요함을 설득하며 솔선해 입교함으로써, 결국 공군의 전신인 육군 항공부대의 창설을 끌어냈다.

초대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된 뒤에는 국군조직법 제정 시 적절한 시기에 공군을 독립적으로 창군할 수 있게 하는 유보 조항이 포함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1949년에는 ‘항공기 구입 기금 헌납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는 데 앞장서 3억5000만 원가량을 모금했고, 이를 통해 캐나다로부터 T-6 10대를 사들이기에 이르렀다.

6·25전쟁 중에는 공군사관학교장과 공군작전참모부장, 그리고 1952년 12월부터는 제2대 공군총참모장(현 참모총장)으로서 지상 전선이 교착된 상태에서 ‘하늘에서의 기동전’을 지휘했다. 평생 조국과 공군밖에 모르고 살았던 그는 공교롭게도 1969년 광복절 새벽에 72년간의 운명적인 삶을 마감했다.

그가 평생 품었던 염원 세 가지는 ‘언제나 내 나라 군복을 입고 내 나라 상관에게 경례하며 내 나라 부하에게 경례를 받아보나?’, ‘언제나 내 강토 안에서 태극기를 그린 비행기를 타고 조국의 하늘을 마음껏 날아보나?’, ‘언제나 우리의 기술과 우리의 설계로 우리가 생산한 비행기를 타보나?’였다. 화려한 관직을 두루 역임했으면서도 청렴을 목숨처럼 여겼던 관계로 유산이라고는 단돈 240원밖에 없었던 그는 유언대로 군복을 입은 채로 영면에 들었다.

대한민국 공군의 역사적 뿌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있다. 최용덕 장군은 올해로 70번째 생일을 맞는 대한민국 공군의 자랑스러운 역사적 정통성 그 자체다. 누구보다도 먼저 전쟁에서 항공력이 갖는 위력을 깨달았던 사람. 누구보다도 먼저 공군의 창설을 꿈꿨던 사람. 누구보다도 전력을 다해 공군의 창설을 이뤘던 사람. 그리고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죽어서도 공군의 발전을 바라고 기뻐했을 사람! 대한민국 공군의 2019년은 ‘70과 50’이다. ‘50’을 더는 쓸쓸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더 나은 ‘100’을 준비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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