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신만고 졸업 전 완성한 무장, 청산리대첩 가능했다

입력 2019. 06. 25   16:37
업데이트 2019. 06. 25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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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제3부, 북만주 황야에 서서 ⑧ 사관연성소 졸업, 그러나 고난의 전주


독립군 잦은 진공작전으로
일본군 본격 군사작전 돌입

 
항일독립운동 핍박 않던 중국군
日 간도 침입 구실 막기 위해
독립군에 비공식 무장투쟁 요구

 
주둔지 떠나야 하는 상황…
무기 도착 이틀 후 계획대로 졸업식



북로군정서 졸업식 기념 사진.
북로군정서 졸업식 기념 사진.


졸업은 예나 지금이나 ‘만감이 교차한다’라는 표현이 딱 맞는 일임에 틀림없다. 학생들만 그런 것이 아닐 터, 그들을 가르친 선생의 입장 또한 다르지 않다. 김좌진, 서일, 이장녕, 나중소, 이범석 등이 첩첩산중과 허허벌판에 터를 닦고 생도를 모집하여 튼실한 독립전쟁의 전위로 키워 놓는 과정에 곡절은 얼마나 많았을까? 지면의 한계로 다 소개할 수 없음이 아쉽다.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생도들의 졸업식은 1920년 9월 9일에 거행됐다. 그러나 그 졸업은 그냥 훈련을 마쳤다고 했던 수료가 아니었다. 8월 30일부터 시작된 졸업시험은 3일 이상 진행되었고, 실기시험인 ‘술과(術課)’시험은 ‘공민대표’들이 참관한 가운데 진행되기도 했다. 졸업식 이틀 전 무기구매대도 무사히 복귀했고 계획된 날 천만다행으로 졸업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날의 졸업식을 이정은 진중일지에 이렇게 남겼다.

“이날 오전 10시 본영에서 제1회 사관연성관 필업식(畢業式, 졸업식)을 거행하다. 내빈은 운집하며 희색이 만면한 졸업생 일동은 경례를 올리고 애국가를 제창하며 소장각하(김좌진)의 개식예사와 총재(서일)·부총재(현천묵) 양 각하의 훈시가 있었고 다음 내빈으로 조성환, 김혁 양씨의 축사 및 최우등생 김옥현 군(대대 부관으로 특임됨)의 답사가 있은 뒤 소장각하의 필업장 수여가 있어서 최후 만장일치로 만세 호창 속에 폐식이 되었다. 오후 7시에 이르러 여흥으로 ‘독립혼’이란 제목으로 연극을 시작하여 취미진진한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졸업을 천만다행이라 표현한 데는 이유가 따로 있다. 이정의 기록에는 ‘운집’, ‘대성황’ 등등의 표현을 쓰고 있지만 김좌진을 비롯한 간부들의 심정은 그리 환희에 찰 수도 없었다. 더 이상 서대파 십리평에서 졸업식을 거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조짐은 이미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에 들면서 독립군들의 투쟁은 강도가 세졌다. 특히 잦은 국내진공작전은 두만강과 압록강 연안을 수비하던 일본군들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거기에다 독립군 단체의 규모도 확대일로였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 됐던 것이다. 일본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본격적인 군사작전에 돌입한다. 5월에 이미 ‘중일합동수색대’를 편성해 탄압을 가하게 되는데 이 어간에 일어난 대표적인 전투가 ‘봉오동전투’다.


봉오동전투 당시 야전지휘를 담당했던 홍범도 장군.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한 뒤의 모습이다.
봉오동전투 당시 야전지휘를 담당했던 홍범도 장군.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한 뒤의 모습이다.


일구어 놓은 전 재산을 봉오동에 묻은 최진동·최운산 형제의 군무도독부가 바탕이 되고 안무의 국민회군, 이흥수의 대한신민단 등이 합류, 홍범도에게 지휘권을 맡김으로써 ‘대한북로독군부’로 탄생한다. 이들은 6월 7일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대파했다. 당시 독립군 연합부대는 봉오동 골짜기의 산속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을 포위망 안으로 유인해 일시에 공격함으로써 토벌대를 절멸시키다시피 했다. 『독립신문』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이 사살된 반면, 독립군 측은 4명의 전사자만을 냈다고 보도했다.

일본군은 그동안 ‘조선인 비적’ 정도로 생각했던 독립군의 실력을 비로소 알게 됐다. 기존의 단순한 토벌작전으로는 독립군을 없앤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체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중국 내로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킬 수는 없었다. 동북군벌 장작림이 친일노선을 견지하긴 했지만 소인배는 아니었다. 일본 정규군이 제 마당 안을 헤집고 다니는 걸 못 본 척할 만큼 자존심 없는 무지렁이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민족주의적 경향도 없지 않았고, 군벌을 통일하여 대륙을 지배하고자 하는 야심도 가진 인물이었다. 극단적 친일로 신세 망칠 일은 결코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항일에 진력하는 한국인들을 대놓고 핍박하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로 ‘중일합동수색대’의 편성에도 불구하고 효과는 지지부진했다. 그렇다고 마냥 한국인 무장단체를 감싸고 돌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택한 정책이 독립군들 스스로가 무장을 해제하거나 아니면 비공식 무장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게 됐던 것이다. 북로군정서가 주둔하던 북만주에서는 대한국민회의 ‘구춘선’이 독립군 측 대표로 국자가(현 연길)에 본부를 둔 혼성 보병 제1사단장 맹부덕(중국 측 진압사령관 겸임)과 교섭에 나서 다음과 같은 합의를 보게 된다.


김좌진이 수여한 사관연성소 졸업장. 대한민국 2년(1920년 9월 9일)이라는 연호는 북로군정서가 임시정부의 군대임을 명확하게 자임하고 있는 방증이다.
김좌진이 수여한 사관연성소 졸업장. 대한민국 2년(1920년 9월 9일)이라는 연호는 북로군정서가 임시정부의 군대임을 명확하게 자임하고 있는 방증이다.


“1. 중국군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의 구실을 막기 위하여 부득이 독립군 토벌을 위한 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독립군은 이와 같은 중국 측의 입장을 고려하여 그 대책을 세워 상호 타협 행동한다. 2. 독립군은 시가지나 국도상에서 군인의 복장이나 무기를 휴대하고 대오를 지어 행동함으로써 중국 측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는다. 3. 중국 측은 토벌을 위한 출동 전에 그 내용을 사전에 통보하여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에 필요한 준비와 시간을 갖게 한다. 4. 중국인과 독립군은 서로 피전을 약정하고 중국군은 출동해도 독립군을 공격하지 않고 독립군의 이동과 산림지대 등지에서 새 기지 건설을 방해하지 않는다.”

당시 북만주 항일무장투쟁단체들은 5월 3일 최진동의 대한북로독군부가 주둔하던 왕청현 봉오동에서 6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 일단의 행동통일을 합의한 상태였다. 북로군정서에서는 김좌진과 나중소가 참석했다. 따라서 주둔지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로군정서는 주둔지를 떠날 수가 없었다. 체코망명군의 무기 구매 건이 있었고, 병사 양성 훈련도 중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다른 독립군 단체들은 8월경에 이동을 시작해 이미 ‘무산 간도(백두산 기슭 도두구 지역)’ 방향으로 이동 중이었다. 북로군정서만 주둔지에 남아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졸업식이 거행됐던 것이다. 졸업 전에 완성한 무장으로 인해 우리는 ‘청산리대첩’이라는 민족 자긍심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참으로 ‘천만다행’이었다. ‘천신만고’라 해야 하나?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 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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