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숙 문화산책] 사라지는 존재들이 주는 힘

입력 2019. 06. 20   15:04
업데이트 2019. 06. 20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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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서양화가
김현숙 서양화가


몇 년 전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 갔었다. 많은 작품 중에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앞에서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 작품은 BBC 방송에서 조사한 ‘가장 위대한 영국 그림’ 1위를 차지한 적도 있다고 한다.

나는 영화 ‘스카이폴’에서 제임스 본드와 Q가 만나는 장면으로 기억돼 있어서 더 관심을 두고 찾았었다. 제임스 본드가 버림받은 자신의 신세가 예인선에 끌려가는 전함과 같은 처지라는 감정이입이 됐던 장면이었다. 물론 영화에서는 또 다른 임무로 맹활약하는 주인공다운 역할이 됐지만, 많은 이에게 회자되는 장면이어서 꼭 찾아봤던 기억이다.

‘전함 테메레르’가 가장 위대한 영국 그림으로 불리는 이유는 98문의 대포가 실린 테메레르호가 1805년에 나폴레옹의 영국 본토 침략 계획을 포기시킨, 트라팔가르 전투에서 대활약했던 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쓸모없게 된 구형 전함 테메레르는 1838년 런던의 운수업자에게 팔아넘겨져 장작이 됐고, 대신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의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터너는 테메레르호가 예인선에 끌려서 런던 남부의 로더 하이드 부두로 들어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흰색의 테메레르호는 형태조차 미미하게 묘사돼 마치 유령선처럼 보이고, 이 배를 끌고 오는 예인선은 작지만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듯 증기선이어서 덩치만 크지 무력한 전함을 당당하게 끌고 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테메레르호 옆으로는 배의 운명처럼 장엄한 일몰 장면이 펼쳐져 있다.

‘트라팔가르의 위대한 승리’를 기억하고 있는 영국인들에게 이 작품은 애달프고 안타까운 그림인 것이다. 터너 역시 이 그림을 ‘나의 연인’이라고 부를 만큼 아꼈고, 동시대의 예술가나 작가들 중에서도 이 그림을 좋아한 이가 많았다고 한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의 늙고 낡아져서 사라져 가는 모습에 연민의 마음이 일렁거렸다. 어떤 삶이든 삶의 궁극적인 지점이 이런 초라한 퇴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삶은 염세적이고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다 똑같은데 열심히 살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만 퇴장 장면이 초라할지라도 영국인들처럼 시대의 역사를 만들어낸 힘을 기억해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삶에 대해 더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사라지는 존재들이 전해주는 힘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 힘이 엄청난 업적이 아니어도 모든 존재는 살아있을 때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꽃은 피고 진다’는 말로 허무한 감정을 표현하거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동백꽃은 지는 이야기보다는 세 번 핀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감의 박수를 친 적이 있다. 나무에서 한 번 피고, 땅 위에 툭 떨어져서 또 한 번 피고, 그것을 바라본 사람의 가슴속에서 세 번째 핀다는 이야기였다. 지고 마는 꽃이라도 피어있는 동안의 아름다움을 전해준 업적이 있기에 우리의 가슴에 남게 되는 것이다. 테메레르호가 승전의 업적을 남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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