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 참호전, 그 한가운데에 서다

입력 2019. 06. 13   16:17
업데이트 2019. 06. 17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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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베르?


밀리터리 기반 1인칭 슈팅게임
아군-적군 참호 사이 좁은 공간
무인지대 쉴 새 없이 주인 교체
독가스 살포 1차대전 특징 보여줘
현대전에서 유의미한 측면 있을 듯    

리얼리티를 추구해 게임의 난도는 높은 편이다. 별도의 조준선 지원도 없고 대부분의 경우 피격당하면 바로 사살 판정이 뜬다.  필자 제공
리얼리티를 추구해 게임의 난도는 높은 편이다. 별도의 조준선 지원도 없고 대부분의 경우 피격당하면 바로 사살 판정이 뜬다. 필자 제공
     
세계 제1차대전은 2차대전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조금 낮은 편이지만, 인류가 그동안 쌓아 온 이성과 과학의 산물들이 결국 대규모 살상전을 초래했다는 결과 측면에서 인류에겐 상당히 충격적인 전쟁으로 오랫동안 역사에 기록될 전쟁이다.

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아이콘은 무엇일까? 거대한 열강들에 의한 대규모 군세의 투입, 최초의 전차 투입과 같은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1차 세계대전을 가장 잘 드러내는 한 가지를 꼽으라면 아무래도 참호전을 빼놓기 어려울 것이다.

전술은 여전히 냉병기(창, 칼) 시대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발달한 무기체계 시대의 도래는 대규모 군대의 돌격이라는 고전적인 전술의 유용성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1차 세계대전의 양상은 대치하는 양 군이 서로 길고 깊은 참호를 파 놓고 버티면서 상대의 돌격을 참호 속 보병과 기관총에 의지해 막아내는 형국으로 나타났다. 포격과 가스,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막힌 전역의 한가운데는 무인지대(No man’s land)라 불리며 사상자의 시체를 파먹는 쥐들만 살아 있는 공간이 되었다. 끊임없는 양측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교착된 채로 움직이지 않는 전선이 1차대전의 참호전이 만들어낸 양상이었다.

알프스 북부에서 북해까지도 이어질 정도로 기나길었던 1차대전 서부전선의 참호들과 그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의 양상들은 여러 책과 영화,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뤄지며 이제는 전쟁사에 대단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완전히 모르는 이야기는 아닌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참호전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과 그 전장 현장에 한번 서 보는 유사경험의 차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오늘 소개할 게임은 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참호전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게임, ‘베르?’이다.

‘베르?’의 전술지도 화면. 아군 참호와 적군 참호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밀고 밀리는 양상이 반복된다.
‘베르?’의 전술지도 화면. 아군 참호와 적군 참호 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밀고 밀리는 양상이 반복된다.


참호 사이 무인지대에서 펼쳐지는 FPS

2015년 처음 출시된 밀리터리 기반의 1인칭 슈팅 게임(FPS) ‘베르?’은 이름 그대로 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 주요 격전지 중 하나였던 베르? 전투의 참호전을 중심에 둔다. 지금은 프랑스 동부, 룩셈부르크 남쪽에 있는 작은 도시인 베르?은 1916년 1차대전 당시 참호전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던 베르? 전투의 배경이었고, 게임은 베르? 전투에서 펼쳐졌던 참호전 양상 중 한 지점을 다루고자 한다.

게임 ‘베르?’은 별도의 시나리오가 없고, 기본적으로 온라인을 통해 여러 플레이어가 각각 참호전의 양 대치진영에 속해 전투를 벌이는 온라인 멀티플레이어 게임이다. AI를 추가하는 기능도 있지만 사실상 튜토리얼에 가깝고, 스토리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없는 만큼 전장 자체의 구성과 작동을 통해 참호전의 양상을 표현한다.

그래서 게임은 꽤 어렵고 동시에 현실주의적이다. 병사들에게는 체력과 같은 개념이 없어, 한 발의 적탄쯤은 맞아도 그저 체력만 깎일 뿐인 게임들과 달리 사실상 한 발 맞자마자 사망하는 방식을 취한다. 현대전을 다루는 게임들에서 볼 수 있는 광학 조준기나 별도의 크로스헤어(슈팅게임에서 사격 시 탄착지점을 보여주는 십자형의 마크) 등은 ‘베르?’에서 지원하지 않는다. 오직 실제 총에 달린 기계식 조준기를 통해서나 아니면 저격수의 조준경 정도 안에서만 조준사격이 가능해 게임의 난도는 상대적으로 높은 편으로 나타난다.

가스탄에 의한 화학전 상황이 터지면 빠르게 방독면을 착용해야 한다. 방독면 때문에 제한되는 시야는 게임에서 승패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가스탄에 의한 화학전 상황이 터지면 빠르게 방독면을 착용해야 한다. 방독면 때문에 제한되는 시야는 게임에서 승패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포격, 철조망, 독가스까지 현장 그대로

‘베르?’은 1차대전의 참호전이 얼마나 밀고 밀리는 양상이었는지를 게임 안에서 그럴듯하게 표현한다. 전장이 되는 양 진영의 참호 사이라는 게임 공간은 결코 넓은 공간이라고 할 수 없지만, 길면 40여 분에 이르는 게임 시간 내내 참호전의 무인지대는 쉴 새 없이 주인이 바뀌며 그 지루했던 교착상황이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낸다.

참여하는 플레이어들은 각각 4인 1조의 분대로 구성되는데, 돌격 신호에 맞춰 일어나는 적군을 향해 사격하거나 아니면 돌격 측의 입장이 되어 일어나자마자 쏟아지는 총탄에 기겁하기도 한다. 1차대전기의 무겁고 커다란 기관총을 사용하기 위해 참호 언덕 위에 거치하는 동안 달려온 적 돌격병에 의해 쓰러지기도 하고, 철조망에 몸이 걸려 이동속도가 느려지는 와중에 날아온 적탄에 쓰러지기도 한다. 포격으로 사방에 구덩이가 파인 무인지대 위로 다시 쏟아지는 포격까지 ‘베르?’의 참호전은 널리 알려진 그 참호전의 현장 속에 플레이어를 데려다 놓는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독가스 상황이다. 적 포격이 가스탄으로 날아오면 참호 주변에 녹색의 가스가 진하게 퍼지기 시작하고, 빠르게 방독면을 착용하지 않으면 곧 사망하는 규칙을 ‘베르?’은 표현하면서 1차대전의 독가스 상황을 연출한다. 가스 마스크를 쓰는 몇 초간 사실상 공격이 둔화되고, 착용 뒤에는 가스 마스크의 좁은 시야 때문에 조준사격이 어려워지는 등의 연출은 참호와 함께 1차대전의 특징으로 자리하는 독가스 상황의 의미를 꽤 비중 있게 그려낸다.



게임으로 간접 체험하는 1차대전사

장비와 교리가 크게 발전한 오늘날의 현대전은 1차대전의 참호전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양상을 보이지만, ‘베르?’을 통해 살펴보는 몇몇 요소들은 여전히 현대전 상황에서도 유의미한 모습을 보이는 측면도 존재한다. 지금도 우리는 화학전 상황에 대비해 빠른 방독면 착용을 훈련하고, 1차대전만큼의 축축하고 어두운 참호는 아니지만, 방어용 진지 구축이라는 주제를 무겁게 다루기 때문이다. ‘베르?’은 한글화가 되어 있지 않아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는 게임은 아니지만, 1차대전사에 관심 있는 장병들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볼 가치가 충분한 게임이다.

<이경혁 게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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