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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무시한 채 쌀소주 제조 ‘佛구경’ 보다 못해 항쟁으로

기사 게시 일시 : 2016-12-14 17:38

<46> 호찌민과 베트남 전통 쌀소주

프랑스의 가혹한 주세 정책…베트남 저항정신 촉매제로

농민 피해 극심…농촌 중심으로 호찌민 항쟁 펼쳐져

 

 

베트남 전통 술을 마시는 모습.

 

호찌민

 

 



프랑스는 오랜 세월 베트남을 식민지로 지배했다. 1859년 최초의 침략을 시작으로 1954년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물러날 때까지 약 100년 동안 베트남을 지배했으며, 베트남 전역을 식민지로 삼은 기간만도 1884년부터 1945년까지 약 60년이다. 베트남 민족은 당연히 가혹한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 대항했는데 격렬한 저항을 부른 계기가 다소 엉뚱하지만 베트남의 전통 술인 쌀소주다.



프랑스, 전통주 세금 부과·제조 독점

한 나라에서 전통술은 민족적으로 그리고 사회적·경제적으로 기호품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민족의 정체성과 생활습관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고 그만큼 쓰임새도 많아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식민지 정책에서 양조 및 주세 정책은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일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조선에서 세원 확보 차원에서 술에 세금을 부과하는 주세 정책을 폈고 곡물 수탈을 위해 양조정책을 추진했다. 조세 수입 중 주세의 비중이 일제에 강점당한 해인 1910년에는 1.8%에 지나지 않았지만 1935년에는 30%까지 늘어났다. 한반도에서 나는 쌀과 곡식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곡식으로 술을 빚지 못하게 금지했는데 그 결과 가정에서 빚는 가양주 제조 면허 역시 1932년에는 단 한 곳으로 줄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에서 전통 가양주가 많이 사라졌고, 그 결과 양조업이 친일세력 내지는 일제 자본가에게 집중됐다.

프랑스 역시 베트남에서 가혹한 식민지 수탈 정책을 펼쳤다. 노동력과 각종 자원·원자재를 착취했고 그 중심에 쌀과 고무 생산이 있었다. 그러나 저항을 부른 직접적인 계기는 베트남 전통 쌀소주였다.


프랑스의 베트남 침공 당시 통킹만 전투.

모양만 비슷한 싸구려 모방품 만들어

전통적으로 베트남은 질 좋은 쌀로 소주를 빚었다. 그 때문에 베트남 쌀소주는 향과 풍미가 뛰어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프랑스는 이런 베트남의 전통 양조 방식을 버리고 싸구려 쌀로 술을 빚어 제조원가를 낮추려 했다. 프랑스가 베트남의 전통 양조법을 무시한 데는 프랑스의 오만이 한몫했다. 전통적으로 와인 강국인 프랑스는 양조기술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의 전통 술 제조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식민지인 베트남의 전통 양조법이 후진적이고 원시적이라고 낮춰 본 데다 자기네 기술력으로는 품질이 떨어지는 쌀을 가지고도 비슷한 수준의 쌀소주를 빚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겉모양만 비슷한 싸구려 모방품만 만들어 냈을 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45도짜리 쌀소주에 물을 타서 25도짜리 희석식 쌀소주를 만들어 냈으니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그저 불량 가짜 술에 지나지 않았다.
전통 쌀소주 양조 과정.


베트남 민족의 자존심 건드려

음식과 마찬가지로 술에도 한 나라의 만족 정신이 깃들어 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전통 쌀소주는 일상 생활에 빠질 수 없는 기호품이기도 하지만 베트남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프랑스가 만든 엉터리 쌀소주는 베트남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었고, 압제와 착취의 상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일부 베트남 문인과 지식인들은 엉터리 프랑스식 쌀소주를 마시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라고 비웃었고, 프랑스식 쌀소주에 반대하는 것은 곧 프랑스 식민지 정책에 저항하는 것이 됐다. 세수를 늘리려고 만든 프랑스식 쌀소주가 베트남 민족의 저항 정신을 키우는 촉매제로 작용한 것이다.



밀주 제작에 베트남·프랑스 마찰 거세져

하지만 베트남의 민족적 정서를 이해하지 못했던 프랑스 식민 당국은 쌀소주로 인해 싹트는 저항정신을 눈치채지 못했다. 1890년대 막대한 재정수입을 기대하고 쌀소주에 세금을 부과했지만 판매가 저조해 기대만큼 세수를 거둘 수 없게 되자 1990년에는 아예 전통 쌀소주의 제조와 판매를 식민지 당국이 독점해 버렸다.

그러자 프랑스 식민지 당국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초래됐다. 전통 쌀소주 제조를 당국에서 독점해 버리자 베트남 사람들은 밀주를 빚을 수밖에 없었고, 밀주 단속을 위해 프랑스 군인과 경찰이 들이닥치면서 베트남인과 프랑스 당국 사이에 마찰이 거세졌다.

프랑스 식민지 당국이 1903년 622명, 1906년 1287명의 주류 밀매업자를 체포했으니 당시 전통 쌀소주 제조와 관련해 베트남의 저항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독립투사들은 프랑스 관리와 경찰을 공격했고 특히 도시보다는 농촌 지역에서 피해가 더 컸기에 호찌민은 베트남 농촌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베트남 독립투쟁이 농촌을 중심으로 전개된 배경 중의 하나다.

사진=필자 제공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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