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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광장]만나보고 싶었습니다-유병현 前 합참의장

기사 게시 일시 : 2013-01-04 23:57

“역전의 武人들 있었기에 우리軍 성장”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있을까. 전장을 누비며 포효했던 장군도, 잘 살아보자며 전국 방방곡곡을 `새마을'로 가꾸고자 애썼던 그도, 또 우리 군의 전비태세 확충을 위해 밤낮 노심초사했던 주역도, 그뿐인가 국가위상을 높이고자 애국을 몸소 실천했던 주인공도 세월을 멈춰 세우지는 못했다.

1950년대에서부터 80년대까지 30여 년 동안 위국헌신했던 유병현(柳炳賢·78·예비역 육군대장)장군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이겨내는 소중한 한 가지가 있다. 반평생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쌓은 군인의 명예다. 그것은 오늘의 그를 지켜내는 힘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군을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다.

그는 한 세대, 30여 년을 군인으로 살았다. 정확히 재어보자면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부터 3개월간의 육사교육을 마치며 그해 11월 육군소위 임관을 시작으로 우리 군의 자주국방기였던 1981년 중반 전역하기까지 꼭 33년이다. 그의 그러한 시간 속에는 6·25전쟁과 파월 등 두 번의 전투 경험이 들어있다.
우리 군 역사의 산증인으로 혹은 산교훈으로 그를 선뜻 꼽는 이유는 그가 전투 지휘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군인으로서의 관록은 계급이 말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에 따른 만큼 훌륭한 값으로 쳐지는 것이 바로 전투 경험이다.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전투에 대한 경험은 군대의 전투기술을 배양하는 밑거름으로 작용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투를 잘 했다는 것은 군대를 잘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국민을 위하고 국가를 위하는 군대의 위용을 지켜내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는 두 번의 전투 경험을 통해 그러한 노하우를 쌓았다. 그리고 우리 군을 전투 잘하는 군으로 키우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인색할 정도를 넘어 틀을 잡는 데 주력했다.

6 ·25, 월남전 모두 경험

이 땅에서 전투가 한창이던 50년대 초, 그는 영관장교였다. 아군의 불리한 전세를 수 없이 반전시키는 데 공헌한 국군 장교들의 전투 능력이 평가되는 한 축을 담당했을 만큼 그도 역량을 발휘했다.
“3년 여에 걸친 전쟁에는 전투 개인장비도 없이 맨 몸으로 참전한 2만여 명의 학도병 등을 포함해 8만여 명의 국군이 전장을 지켰습니다. 그로부터 십 수년 동안의 발전기간을 거쳐 우리 군은 이제 69만 명의 대군으로 성장할 만큼 컸습니다. 우리 군이 이렇게 자라기까지에는 역전의 무인들이 보였던 군인정신이 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닙니까” 며칠 후면 건군 54주년을 맞게 될 우리 군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당시를 회고하는 그는 전투가 한창이던 1951년 미국으로 건너가 군사교육도 받았다.

미국으로부터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치르는 동방의 작은나라 장교였지만 그는 교육기간 내내 한국군 간부라는 사실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그는 교육을 받는 동안 그들로부터 예상외의 질문을 자주 받았다. “한국군 장교의 봉급이 얼마나 되나.” 당시 그의 봉급을 미화로 계산하면 5달러 50센트였다. “그것가지고 어떻게 생활하고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습니까.” 미국인으로서는 아마 정상적인 궁금증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네 정서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전황에 놓였던 당시로서는 더욱 그랬다. 돈벌려고 군을 택한 게 아닌 그로서는 황당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군의 실정을 모르는 채 혹시 얕잡아 보는 농섞인 대화를 던지려 하는 그들을 오히려 한국화하며 한국군,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켰다. “이것 보시오 우리는 돈을 바라고 군에 온 것이 아니요. 지금과 같은 전쟁 상황에서 우리는 군복 입은 것만으로도 만족함을 느끼고 있소. 오히려 국가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요.” 그때 자신이 한 대답을 그는 지금도 기억하며 떠올리고 있다.

그의 그러한 자세와 배짱은 훗날 그가 외교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한 근간이었을까. 그의 뛰어난 친화력은 그가 귀국해 전선을 누빌 때도, 휴전 후 사단장이나 한미연합사부사령관으로 있을 때뿐만 아니라 합참의장으로 재직할 때까지 계속됐다. 미국이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 즉 한·미간의 군사적 관계를 돈독히 하는 중심의 축에 그가 서게 될 정도로 그는 미국의 군사 실무자에게 알려졌을 정도다.
그에게는 특이한 경력이 있다. 군인이면서 장관직을 경험했다. 사단장직을 두 차례 맡았던 경력이 있었기에 그렇다. 41년 전인 1961년 그는 육군 준장 계급에 올랐다.

군인의 신분이면서 1961년부터 3년 여에 걸쳐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위원으로도 활약했고 농림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전후 복구가 한창이던 당시로서도 그의 능력은 높이 평가됐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는 다시 군으로 복귀했다.
새마을을 가꿔 경제부흥을 꾀하자며 국민적 역량을 결집하던 시기 그는 정치와 관계의 요청을 뿌리치고 육군의 사단장직을 원해 다시 복직됐다. 당시로서도 획기적인 조치였다. 그점을 두고 말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군인이 군인의 길을 걷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그러한 신념은 확고했다.

군인다운 그의 모습은 맹호부대장으로 파월해 절정을 맞기도 했다. 혁혁한 전공은 둘째치고 그의 천부적인 군사적 외교감각은 주월 미군사령부의 고위층을 여러 차례 감동시켰다. 그를 아는 미군은 그를 가리켜 `철저한 원칙에 입각해 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으로 평했다. 그의 지휘 철학은 꾸준한 전술연마, 엄정한 군기확립이었다. 영관 시절 경험한 6·25는 지휘 부대가 주월 한국군 중 전투서열 1위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했다.

군사외교 감각 천부적

그는 비정규전 상황에서는 중대급 이하 제대의 전투력이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전술적 교훈을 이끌어냈다. 때문에 정보전 능력이 월등한 미군도 `맹호 교리'에 관심 두며 연일 초급간부와 고급하사관을 맹호부대에 배속시켜 한국군의 모범적 전투를 체험도록 했다. 이같은 현상을 본 미 타임즈의 종군기자는 `선생을 가르치는 학생'이라고 대서 특필했다.
6·25전쟁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던 나라의 군이 베트남전쟁에서 그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얘기였다. 맹호부대를 이끌었던 그가 우리 군의 지상전투 능력을 세계에 과시하는 데 기여한 주인공으로 기록되고 있는 이유다.

20년 전 그는 주미 대사를 지냈다. 5년 여 동안의 워싱턴 생활을 통해 한·미 관계의 굵직굵직한 사안도 무리없이 처리했다. 그는 재임기간 중 한·미 안보현안에 대한 다섯 차례의 회담성과도 올렸다. 그는 군사전문가로 구성된 군의 역할과 위치를 고려해 추진하는 미국의 대내외 군사정책 수립과정을 직접 보아왔다고 한다. 우리와는 현실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선진 강군시대를 맞을 만큼 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군사정책일 경우 정치적으로의 결정에 앞서 군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 추진되는 그러한 민·군 협력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노장군의 이 말은 오늘의 우리네 현실을 두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안보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평화로울 때 지키려 하는 국민적 의식의 확산이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는 영원한 군인이다. 우리 군을 태동시키며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던 군의 원로는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


유병현 장군 누구인가…

육사 7기 출신의 유병현 대장은 뛰어난 전략을 구사하는 지장이었다. 33년 군대 생활 중 21년간 장군으로 지냈다. 남북 군사가 첨예하게 대립되던 시기, 우리 군이 자주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애쓰던 70년대에 군의 요직을 거쳤다. 그는 군생활을 통해 한치의 빈틈을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의지가 굳셌다.

과거 사단장이나 군단장 혹은 4성장군으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자녀교육을 위해 그의 집에는 부관이나 당번병이라도 얼씬못하게 할 정도였다. 아버지가 군인이지 자식이 군인이 아니라는 점을 늘 교육했을 만큼 공과 사가 분명했다. 그를 모셨던 부관만도 15명. 그 중 13명이 장군이 됐다. 지금도 3성장군과 2성장군으로 근무하는 부하가 있다. 주미 대사로 있던 1983년 10월 아웅산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현지 부상자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필리핀 미군기지에 있던 미군의 에어 앰뷸런스를 현지로 급파하도록 미국과 협조할 만큼 적극적 외교를 펼쳤던 일은 유명하다.

그는 오른쪽 다리를 절며 군생활을 했다. 1958년 연대장 시절 강원도 김화지역의 진지공사 현장을 지휘하다 무너져내린 흙에 매몰돼 하반신에 타격을 입었다. 평소의 생활신조는 정직. 부인 양정희씨와의 사이에 4남을 두고 있다. 18년 전부터 광장동 워커힐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 경 력-
▲1948년 육군 소위 임관 ▲64년 사단장 ▲66년 파월 맹호부대장 ▲67년 합참 작전기획부장·군사정전위 한국대표 ▲69년 육본 정책기획부장 ▲70년 육본 작전참모부장 ▲72년 육군 5군단장 ▲74년 합참 본부장 겸 대간첩대책본부장 ▲78년 한·미 연합사 부사령관 ▲79년 12~1981년 5월 제16대 합동참모의장 ▲81~85년 주미대사 ▲85~86년 외무부 본부대사

〈사진=김태형 · 대담=정순훈 기자〉



사진=김태형^ 대담=정순훈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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