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주 교수의 세계사여행 <13> 민족주의의 시대: 통일 독일제국의 탄생
통일 전까지 英·佛 등 주변 강국 방해공작으로 39개 국가로 분열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서 승리…베르사유 궁전에서 통일 선포
오늘날 우리 한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과업이 있다면 이는 남북통일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열강들에 의해 양분되고 이후 전쟁으로 더욱 높아진 분단의 장벽을 걷어내고 세계를 향해 새롭게 ‘용틀임’하는 것이리라. 왜 하나가 되고자 하는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남북한은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흔히 민족주의(nationalism)로 알려진 혈통·언어 등을 공유하는 ‘동질적 문화집단 의식’은 19세기 후반기에 유럽에서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외세의 지배나 간섭으로 분열돼 있던 국가들의 민족의식이 형성 및 고양되면서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는 열망이 거세게 일어났던 것이다. 이들 중 1860년대에 달성된 독일의 국가 통일을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 주변국의 통일 방해 공작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 비해 독일의 통일국가 수립이 이토록 지연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프랑스·오스트리아 같은 주변 강국들의 지속적인 방해 공작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유럽의 중앙부에 통일된 국가가 등장, 기존 세력균형에 변화가 초래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30년 전쟁을 종결짓는 베스트팔렌 조약(1648) 이후 독일 지역은 융커라 불린 토지귀족들이 지배하는 300여 개의 군소 영방국가(領邦國家)로 분열된 채 상호 반목과 대립을 이어오고 있었다.
또 다른 저해 요인은 종교 문제였다.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 이래로 특히 독일 지역에서는 신교와 구교 간에 대립이 격화돼 30년 전쟁까지 벌일 정도였다. 이후에도 로마 교황청은 정치적으로 독일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과 손잡고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통일을 방해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19세기에 접어들면서 통일을 향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통일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의 독일 침공이었다. 독일 지역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기존의 수많은 영방국가들을 쓸어버린 후 크게 4개의 지역(라인연방·프로이센·오스트리아·작센)으로 통합했다. 물론 나폴레옹 몰락 후 독일은 다시 39개의 대소 국가로 분열됐으나, 300여 개로 갈라져 있던 이전 시대보다는 통일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 경제적 통일부터 이뤄
다행스럽게도 정치적 통일에 앞서서 경제적 통일을 이루려는 시도가 있었다. 리스트와 같은 민족주의 경제학자가 주창한 이론을 토대로 프로이센이 주도한 ‘관세동맹’이 결성(1834)돼 1841년에 이르면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지역의 대부분 국가들이 참여했다. 회원국들 간에 국내관세가 철폐돼 일종의 경제적 통일이 달성된 셈이었다.
정치적으로 독일의 통일 과업에 기폭제를 제공한 것은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이었다. 이 혁명의 여파로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 각지에서 통일운동이 불붙었다. 무엇보다도 1848년 5월 독일 중앙부에 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범국민적 회의가 열렸다. 헌법 제정과 통일 문제 논의를 위해 독일 각지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프랑크푸르트로 모여들었다. 이때 국민의회에서 제기된 가장 중요한 의제는 통일 노선에 대한 것이었다. 다민족국가인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통일국가 건설을 내세운 오스트리아의 ‘대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게르만족만의 통일국가를 수립하자는 프로이센의 ‘소독일주의’가 팽팽하게 맞섰다. 예상을 뒤엎고 프로이센의 소독일주의가 최종 채택됐으나, 당사국인 프로이센의 국왕이 이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국민의회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통일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토론과 표결에 기초한 자유주의적 방식의 통일 시도에서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독일인들은 이후 권위적 보수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힘에 기초한 통일 노선을 지지했다. 이때 통일 과업을 이끌 주역으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철혈재상으로 불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재임 1862~1890)였다. 동프로이센의 융커 가문 출신으로 외교가에서 공직생활의 잔뼈가 굵은 그는 1862년 빌헬름 1세에 의해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발탁된 후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했다. 특히 군사력 증강에 필요한 군 예산의 대폭 증액을 의회에 요청했고, 의회가 이를 반대하자 향후 독일 통일은 낭만적 이상(理想)이 아니라 현실에 기초한 군사력 증강과 전쟁, 즉 ‘철(鐵, Iron)과 혈(血, Blood)’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 철혈재상의 등장
이후 군비 증강에 진력한 비스마르크는 186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통일을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우선, 1864년 오스트리아와 연합으로 덴마크와 전쟁을 벌여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 지방을 차지했다. 곧 오스트리아를 자극해 1866년 전쟁을 도발하도록 유도한 후 사전 준비된 군사력을 동원해 단기간에 승리를 거뒀다. 여세를 몰아서 최후의 통일 저해 세력인 프랑스를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때마침 터진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빌미로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자극, 프랑스로 하여금 먼저 선전포고하도록 유도했다. 1870년 7월 중순 양국 간에 전쟁이 발발했으나 프랑스는 채 두 달도 버티지 못하고 프로이센군의 공격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1870년 9월 세당전투에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를 생포할 정도로 프로이센군은 대승을 거뒀다. 마침내 1871년 1월 초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심장 베르사유 궁전에서 통일독일제국의 선포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독일 통일은 예상치 못한 국가와 인물에 의해 달성됐다. 우선, 중앙 유럽의 전통적 강국이던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북쪽 끝 척박한 땅에서 대두한 프로이센이 통일의 중심국가가 됐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국가통일의 열망을 품고서 이를 차근차근 추진해온 비스마르크라는 비전을 지닌 정치가가 있었다. 그는 필요 시 주변 열강들을 자국의 지지 세력으로 만드는 교묘한 현실외교와 전쟁이라는 무력적 수단을 통해서 그토록 지난(至難)했던 국가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독일의 통일은 아래로부터 분출된 국민적 열망이 아니라 국가의 힘에 의한 위로부터의 통일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처럼 거침없이 발휘된 ‘국가 우위’의 전통은 이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후에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재앙의 전조(前兆)가 됐다는 점을 당대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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