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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그 땅에 투사가 있었다 그 곳에 투쟁이 있었다

입력 2025. 05. 13   16:45
업데이트 2025. 05. 1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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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세계 속 독립운동 거점 ② 미국 서부지역

독립 위한 비행의 꿈을 찾고…
잠들지 않는 열망이 묻히고… 
거리 가득 메운 함성이 들렸다

국방일보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연중 특별기획 ‘다시 빛날 기억들’을 진행하고 있다. 최대 독립운동지였던 서울·경기도권 사적지를 비롯해 전국 곳곳의 독립운동기념관을 탐방·소개하고, 미국·중국 등 국외 사적지를 알리는 기획이다. ‘세계 속 독립운동 거점’ 시리즈 두 번째 순례지는 미국 서부지역이다. 이 지역은 워싱턴DC와 함께 미국 내에서 대한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히 펼쳐진 곳이다. 그 흔적도 무수히 많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 따르면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캘리포니아주와 워싱턴주에는 약 50곳의 독립운동 사적지가 있다. 그중 주요 사적지를 소개한다. 서현우 기자/ 사진·도움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클레어몬트 한인학생양성소 터

클레어몬트 한인학생양성소는 공립협회 회원들이 남부 캘리포니아에 사는 한인들을 미국의 정규교육에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설립했다. 학생들은 방학기간을 이용해 농장에서 일하고, 그 수입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08년 8월 이순기, 방화중, 강영대, 임정구 등은 ‘학생양성소 설립 취지서’를 발표했다. 1911년 2월 클레어몬트 한인학생양성소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모금이 추진됐고, 그해 10월 건물이 완공됐다. 1916년 전후 운영이 어려워져 1920년대 들어 폐소됐다. 현재는 소방서가 들어섰으며, 그 옆의 경찰서 자리를 터로 보는 견해도 있다.

 

1920년 촬영된 윌로스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 모습.
1920년 촬영된 윌로스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 모습.

 

윌로스 비행가양성소 대원들이 비행실습을 했던 활주로. 현재 터는 농지가 됐다.
윌로스 비행가양성소 대원들이 비행실습을 했던 활주로. 현재 터는 농지가 됐다.


윌로스 비행가양성소 터

캘리포니아주 윌로스에는 한인 비행가 양성을 목적으로 비행학교가 설립됐다. 설립·운영에 필요한 자금은 캘리포니아에서 벼농사로 부를 축적한 김종림이 지원했다. 1920년 7월 교관, 비행기, 교육시설 등 기본여건이 마련돼 문을 열었다. 교관은 외국인 프랭크 브라이언트였다.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졸업한 이용선, 오림하, 이초 등이 비행사로 임명됐다. 개소 당시 학생 수는 15명이었다. 이후 대홍수로 김종림 등의 사업이 어려워져 재정난을 겪었고, 1921년 4월 문을 닫았다. 터는 현재 농지가 됐다.

 

 

장인환과 전명운이 더럼 W. 스티븐스를 처단했던 곳(페리부두에 위치한 페리빌딩과 광장).
장인환과 전명운이 더럼 W. 스티븐스를 처단했던 곳(페리부두에 위치한 페리빌딩과 광장).


샌프란시스코 장인환·전명운 의거지

장인환과 전명운이 미국인 더럼 W. 스티븐스의 친일 발언을 규탄했던 곳이다. 스티븐스는 미 국무부에서 근무하다가 일본 외무성 고문을 맡았다. 그는 일본의 한국 정책 홍보에 앞장섰다. 특히 1908년 3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옹호하는 기자회견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었다.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스티븐스를 찾아가 항의하고 정정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장인환·전명운은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DC로 이동하려는 스티븐스를 저격했다. 이들의 의거는 독립을 위한 의열투쟁의 효시가 됐다.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터 

대한인국민회는 미주 한인사회의 중심 기관으로 독립운동 선전 및 자금 지원을 주도했다. 북미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가 1909년 2월 통합된 국민회를 바탕으로, 1910년 2월 대동보국회까지 합친 단체다. 사무실은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회관을 사용했다. 이후 페리 스트리트, 마켓 스트리트, 오크 스트리트로 이전했다. 페리 스트리트에 있던 건물은 고속도로로 편입돼 사라졌고, 마켓 스트리트의 건물은 중·개축으로 외형이 변한 채 남아 있다.

 

 

리버사이드 한인들 앞에서 연설하는 안창호.
리버사이드 한인들 앞에서 연설하는 안창호.


리버사이드 안창호 동상

한인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동상이다. 안창호는 1902년 9월 한국을 떠나 11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1904년 미국 이민 초기 거점이 된 리버사이드로 이동해 한인들을 지도했다. ‘노동주선소’를 세우고 공립협회를 설립하는 등 한인사회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1년 8월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시청 앞에 동상이 건립됐다.

 

로즈데일 공동묘지의 현재 모습.
로즈데일 공동묘지의 현재 모습.


로즈데일 공동묘지 & 리들리 공동묘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로즈데일 공동묘지는 1884년 설립됐다. 모든 민족에게 차별 없이 개방된 로스앤젤레스 최초의 공동묘지다. 약 280명의 한인이 잠들어 있다. 그중에는 독립운동을 전개한 임준기, 최진하, 한시대 등도 있다. 리들리 공동묘지는 1862년 건립된 캘리포니아 주정부 공동묘지다. 로즈데일 공동묘지와 함께 이민 초기 한인이 다수 이곳에 잠들어 있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김호, 이살음, 이재수 등이 안장됐다가 국내로 봉환됐다.

 

 

로스앤젤레스 한인국방경위대 훈련지(현 엑스포지션 공원) 전경.
로스앤젤레스 한인국방경위대 훈련지(현 엑스포지션 공원) 전경.


로스앤젤레스 한인국방경위대 훈련지

1942년 2월부터 1943년 6월까지 로스앤젤레스 엑스포지션 공원 내 한인국방경위대원들이 훈련했던 곳이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미주 한인들은 캘리포니아 주방위군과 협의해 민병대 부속의 한인경위대를 편성했다. 훈련은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매주 한 차례 시행됐다. 1942년 3·1절 기념행사에선 관병식도 했다. 이듬해 6월 미 육군 방침에 따라 군사조직으로 권리를 상실, 사실상 해산했다. 현재도 엑스포지션이라는 이름의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우스카타리나 스트리트의 흥사단 본부 현재 모습.
사우스카타리나 스트리트의 흥사단 본부 현재 모습.


로스앤젤레스 흥사단소 

흥사단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주도로 1913년 창립됐다.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으로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고 독립교육과 사회활동을 했다. 초기 흥사단 본부단소는 별도로 두지 않고 안창호 거주지를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스앤젤레스 흥사단 본부는 1916~1929년 사용된 노스피게로아 스트리트와 1929~1979년 사용된 사우스카타리나 스트리트의 2곳이 알려져 있다. 노스피게로아 본부는 미국인에게 임대한 2층 목조건물이었다. 1층은 안창호와 가족이 지냈고, 2층은 송종익·홍언·장이욱 등 단원들이 거주하며 본부로 이용했다. 노스피게로아 본부 자리는 사라져 과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사우스카타리나 본부는 개인 소유 주택이었으나 2023년 국가보훈부가 건물을 매입했다. 당시 철거 위기에 처했던 상황에서 독립운동 사적지 보존을 위해 정부가 건물을 사들였다. 현재 로스앤젤레스시 사적지로 등록돼 있다.


다뉴바 애국선열기념비와 3·1절 1주년 행사 개최지

다뉴바에는 포도농장에서 일하는 한인 노동자들이 대거 있었다. 이 중엔 강혜원·강원신 등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다뉴바에는 1914년 5월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설립됐다. 지방회는 1919년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곧바로 독립선언을 축하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이어 다뉴바 한인들은 1920년 3월 1일 기념 퍼레이드를 했다. 행렬에는 다뉴바를 비롯해 인근에 거주하는 한국인 300여 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대형 태극기를 들고 행진했고,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를 외쳤다. 다뉴바 한인장로교회 터에는 2008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념비엔 한인 독립운동에 관한 설명과 당시 사진이 담겼다. 기념비 옆에는 기부명단 표지석도 설치됐다.


델라노 한인감리교회

캘리포니아주 중부 델라노는 인근 리들리, 다뉴바와 함께 많은 수의 한인이 거주했다. 이 교회는 1929년 7월 임정구 목사가 이 지역을 찾아 기도처소를 마련하며 시작됐다. 1930년대 만주지역 동포를 위한 구제금을 걷었고, 지역한인연합 3·1절 기념식과 순국선열 기념식을 열었다. 1936년 건축된 델라노 한인감리교회는 흔적이 없으며, 1954년께 이전 사용한 클린턴 스트리트의 교회 건물은 원형이 보존돼 있다. 교회는 1958년 6월 델라노 거주 한인 수가 줄면서 문을 닫았다.


시애틀 YMCA 회관

1913년 대한인국민회 2대 총회장인 윤병구가 미국인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에 대해 연설했던 곳이다. 1913년 10월 12일 시애틀 기독교청년회에서는 YMCA를 창설한 조지 윌리엄스의 생일 축하연을 열었는데, 이때 윤병구가 나서 연설했다. 당시 현지 언론 ‘더 시애틀 포스트 인텔리전스’는 이를 상세히 보도했다. 윤병구는 이후에도 한국의 독립을 미국 각지에 소개하고 다녔다.


시애틀 지역 한인들의 모임 장소였던 동양노동소 터.
시애틀 지역 한인들의 모임 장소였던 동양노동소 터.


시애틀 동양노동소 터

동양노동소는 1910년대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일자리를 찾으려 하는 한인들에게 노동을 주선하고,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한인들의 모임 장소이자 독립운동자금을 거뒀던 곳이기도 하다. 초기 한인들은 노동주선소 등을 중심으로 한인단체와 연락하고 독립운동자금도 모았다. 단순히 노동 주선과 숙박 제공이 아닌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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