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다시 빛날 기억들
제주지역 유일한 생존 애국지사 강태선 옹
조용히 스치는 바람, 관광객 발소리 사이, 광복 의미 되새기는 공간
열다섯에 일본 유학길 “조센징 따위”가 모멸에 동지들과 나선 독립운동
제주 항일운동사 기록 대통령 표창·건국훈장 애국장 자택에 애국지사 기림비
80여 년 전 일제에 맞서 싸운 청년 독립운동가는 온데간데없고 만 백 살, 상수(上壽)의 노인만이 남았다. 말하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예전 같지 않지만 그의 눈빛과 머릿속에 있는 광복정신은 그대로였다. 강태선 애국지사는 국내에 생존해 있는 애국지사 네 명 중 한 명이자, 제주에서 거주하는 유일한 애국지사다. 인터뷰는 제주항일기념관을 취재하면서 우연히 강 지사의 소식을 들은 것에서 시작됐다. 최근 건강이 악화하면서 언론과의 인터뷰를 삼가고 있지만, 제주보훈청과 광복회 제주도지부에 도움을 요청해 가까스로 그와 연락이 닿았다. 특히 ‘국방일보’라는 이름을 들은 아들 강대성 씨가 아버지를 설득해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다. 인터뷰 역시 강 지사가 고령인 점을 고려해 대성 씨의 도움 아래 이뤄졌다. 글=임채무/사진=조용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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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참 깨끗하네요.” 기자의 말에 힘겹게 미소 지은 강 지사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마 ‘웰컴 투 삼달리’ 촬영지로 이름을 알린 강 지사의 자택은 방송 종영 후 하루에도 수십 명의 관광객이 찾아든다고 한다. 문 앞에는 한글·영문 안내문이 걸려 있어 누구나 마당에 들어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처음에는 방송 촬영 때문에 찾아오던 분들이었지만 정부에서 세워준 아버지의 기림비와 명패를 보고 돌아갈 땐 꼭 인사를 남기고 가십니다.” 아들 대성 씨가 설명했다. 머리 위로 조용히 스치는 바람 소리, 드문드문 들려오는 관광객의 발소리 사이로 강 지사의 자택은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간이 됐다.
강 지사는 생각보다 건강한 모습이었다. 다만 얼마 전까지는 근처 오름에 오를 정도로 건강했는데 최근엔 겨우 걸을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 했다.
방 안 한쪽에는 국제학교 학생들이 선물한 전자액자와 그림, 공로패가 놓여 있었다. 강 지사는 “정부 관계자와 학생들이 올 때마다 준 선물이에요. 특히 학생들이 제 그림을 그려 선물했는데, 정말 고맙더군요.” 강 지사는 애정 어린 손길로 전자액자를 만지면서 말했다.
소년 강태선의 독립운동 의지는 열다섯 살 때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싹텄다. 1939년 전문학교 입학을 준비하러 건너간 오사카에서 그는 매일 “조센징 따위가”라는 모멸적 언사를 견뎌야 했다. 나라 없는 설움에 못 이겨 그는 마침내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1942년 8월 강 지사는 지원호·심종보 등과 뜻을 모아 ‘정신무장’을 독려하고 곧바로 일본 패망을 기원하는 소규모 봉기에 돌입했다. 다음 해 9월 오사카 중심가를 걷다가 사복경찰에 연행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2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사카이형무소 독방에서 그는 끊임없는 고문과 구타를 견뎌야 했다.
“말 한마디 잘못할 때마다 매를 한 대씩 맞았어요. 고통스러웠지만 조국을 위한 일이었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 광복 소식과 함께 풀려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제주 항일운동사를 기록하고 후진을 양성하며 살아왔다. 정부는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지난해 8월 15일에는 자택 앞에 ‘강태선 애국지사 기림비’를 세워 그의 숭고한 헌신을 기렸다.
“제가 한 일은 수많은 선열의 희생에 비하면 아주 작은 불씨에 불과합니다. 다만 이 광복정신이 후대에 온전히 이어진다면 그 희생은 절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광복정신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들의 헌신과 용기 기억하고…기록해야
생존 애국지사는 모두 5명
강태선 지사와 같은 생존 애국지사는 모두 5명으로 이 중 4명은 국내, 1명은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강 애국지사(100·제주 서귀포), 국내 항일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이석규 애국지사(전북 익산), 광복군 출신인 김영관(서울 송파)·오성규 애국지사(경기 수원), 학생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하전 애국지사(미국)가 생존해 있다.
을미사변(1895) 발생 130년, 한일병합(1910) 115년이 흐른 지금, 그 시대를 몸소 겪은 애국지사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일제 강점의 상처와 독립운동의 역사가 결코 먼 과거가 아님을 말해준다. 이분들의 생존 자체가 독립을 향한 의지와 희생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가치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되새기게 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들의 생은 막을 내리고, 직접 현장에서 울려 퍼졌던 그 목소리도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에 지금 이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헌신과 용기를 꼼꼼히 기록하고 기억에 새기는 것이다.
그 뜻을 후대에 제대로 전하는 일이야말로 그동안 지켜온 독립운동 정신을 영원히 빛나게 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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