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패션의 역사

전장 속에 핀 雨아함

입력 2025. 03. 17   16:08
업데이트 2025. 03. 1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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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 - 불멸의 아이템 트렌치코트


면·양모에 방수 처리한 원단, 폭우·진창으로부터 몸 보호
허리 벨트·어깨 견장·D링·깊은 포켓 등 군복으로서 기능 발휘
클래식한 핏·오버사이즈 핏, 스트리트 감성에 다양한 스타일 변신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병력수송 기차역에서 트렌치코트를 입은 육군 장교가 찍힌 사진. 출처=영국 국립육군박물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병력수송 기차역에서 트렌치코트를 입은 육군 장교가 찍힌 사진. 출처=영국 국립육군박물관



다시 비가 온다. 길, 숲, 들판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고 세상은 온통 진흙투성이로 변해버렸다. 벨기에 파서달러 지역을 둘러싼 야전 참호에 틀어박혀 지칠 대로 지친 영국 병사들은 짜증 섞인 동작으로 대충 걸치고 있던 외투 매무새를 다듬는다. 빗물로 인해 진흙이 튀어 군복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데, 그 모습이 프록코트를 닮았다.

이처럼 전쟁 중 참호 안에서 비와 진창으로 인한 오염을 막기 위해 착용하는 프록코트 형식으로 내수성이 강한 방우(防雨) 외투를, 대개 이 옷이 활약한 장소에서 이름을 붙여 ‘트렌치코트(Trench Coat)’라고 한다.


트렌치코트의 기원을 두고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찰스 매킨토시가 개발한 방수 원단에서 비롯됐다는 설이다. 영국 맨체스터에서 출범한 의류 브랜드의 창시자 매킨토시는 화학자였다. 1823년 6월 그는 고무를 이용해 방수 코팅된 직물을 만들었고, 이 원단을 활용한 외투가 ‘레인코트’라는 통칭으로 영국군에 보급됐다.

다른 설은 토머스 버버리가 세운 브랜드 ‘버버리’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기업인이자 발명가였던 그는 동계에 따뜻하고 하계에 통풍이 잘 되는 농부들의 옷에서 영감을 얻어 고무를 넣은 레인코트와 달리 아프리카산 솜으로 짠, 내수성 있는 원단을 만들었다. 1879년 버버리는 면과 양모에 방수 처리를 하면서도 통기성을 유지하는 개버딘을 개발한다.


이 원단으로 제작한 코트는 19세기 말에 발발한 보어전쟁에서 그 실용성을 입증받았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 장교들에게 지급됐다. 버버리가 생산한 이 코트는 장병들의 상징이 됐다. 어깨 견장, 허리 벨트, D링, 깊은 포켓 등 현대적 트렌치코트의 요소는 이 시기 확립됐다. 전쟁 기간 영국 정부가 군수품으로 다량 보유했던 트렌치코트를 전쟁이 끝난 후 민간에게 보급하면서 많은 사람이 일상 속에서도 트렌치코트를 입게 됐다.

 

 

오늘날의 버버리 트렌치코트. 출처=버버리코리아 홈페이지
오늘날의 버버리 트렌치코트. 출처=버버리코리아 홈페이지

 

버버리 2025 봄 컬렉션 룩북에 수록된 트렌치코트. 출처=버버리 인스타그램
버버리 2025 봄 컬렉션 룩북에 수록된 트렌치코트. 출처=버버리 인스타그램



트렌치코트는 단순한 외투가 아니었다. 폭우와 진창 속에서 옷을 보호했고, 허리 벨트엔 권총이나 각종 장구를 걸 수 있었다. 어깨 견장은 계급장을 부착하는 용도였다. D링은 수류탄이나 보조 장비를 걸 수 있도록 설계됐고, 깊은 포켓은 지도나 필수품을 넣기에 적합했다. 개버딘 원단 덕분에 습한 참호에서도 몸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군복과 방수 외투의 기능이 결합한 트렌치코트는 장병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의복이 됐다.

1차 세계대전 후 많은 군인이 트렌치코트를 입고 귀환했다. 이들은 전장에서 익숙해진 이 옷을 일상에서도 입었다. 1920년대 영화와 잡지에서 유독 트렌치코트를 입은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대중적 인기가 급격히 높아지자 기능성을 유지하면서도 세련된 이미지가 강조됐다. 1940년대에는 험프리 보가트가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트렌치코트를 입고 등장하며 패션 아이콘이 됐다. 이후 트렌치코트는 더는 군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세련된 도시인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는다.

전통적인 트렌치코트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양복 위에 걸치는 형태였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다양한 실루엣이 등장한다. 허리를 강조한 핏, 짧아진 길이, 다양한 컬러와 패턴이 추가됐다. 1960년대 이브 생 로랑은 여성용 트렌치코트를 선보이며 여성복 시장에서도 트렌치코트의 인기를 끌어올렸다.

현대 디자이너들은 전통적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소재와 실루엣에 다양한 변화를 준다. 발렌시아가는 오버사이즈 핏을, 알렉산더 맥퀸은 테일러링을 극대화한 트렌치코트를 선보였다. 프라다는 기능성을 강조한 나일론 트렌치코트를 내놨고, 오프화이트는 길이와 커팅을 변형하며 스트리트 감성을 더했다. 상대적으로 클래식한 이미지에서 벗어나면서도 본질적 요소를 유지하는 것이 현대 트렌치코트의 특징이다.

지속 가능성이 패션 산업의 핵심 화두가 되면서 트렌치코트도 변화하고 있다. 오늘날엔 트렌치코트의 선구 기업인 버버리가 재활용 소재와 유기농 면을 사용한 트렌치코트를 출시하는가 하면 스텔라 매카트니는 동물성 소재를 배제한 친환경 개버딘을 활용한다. 나노 기술을 적용한 방수 원단, 리사이클 폴리에스테르를 활용한 제품도 등장했다. 클래식한 디자인과 지속 가능성을 결합한 트렌치코트는 앞으로도 패션에 중요한 역할을 할 전망이다.

트렌치코트 소재는 다양한데, 전통적인 개버딘은 튼튼하고 방수 기능이 뛰어나다는 것이 특징이다. 면과 폴리에스테르 혼합 원단은 가볍고 관리가 용이하다. 가죽 소재는 강렬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울 혼방(다른 섬유·길이·직경·색깔의 섬유를 섞어 실을 뽑은 뒤 천을 만드는 것)은 보온성이 뛰어나다. 나일론이나 테크니컬 원단은 기능성을 극대화한 현대적 선택지다.

트렌치코트를 선택할 때는 핏, 길이, 디테일이 중요하다. 클래식한 핏은 다양한 스타일에 활용 가능하며, 오버사이즈 핏은 현대적 감각을 더한다. 무릎 길이는 가장 무난하지만 짧은 기장은 캐주얼한 느낌을, 긴 기장은 우아함을 강조한다.

단추, 벨트, 안감 등 세부 요소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 특히 안감은 소재와 마감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면 안감은 통기성이 좋고 편안하며, 실크나 비스코스 안감은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박음질이 깔끔한지, 안감이 들뜨거나 주름지지 않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트렌치코트 스타일링은 다양한 스타일에 어울리는 매치를 연출할 수 있다. 슈트와 함께 입으면 격식 있는 룩이 되기도 하고, 데님과 스니커즈를 매치하면 캐주얼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포멀한 자리에서는 슬랙스와 함께, 캐주얼하게는 심지어 후드티와 레이어링 할 수도 있다. 벨트를 묶어 실루엣을 강조하는 것도 방법이다.

스카프, 장갑, 모자 등의 액세서리를 활용하면 트렌치코트가 더욱 돋보인다. 가벼운 실크 스카프를 목에 둘러 우아한 느낌을 더할 수 있으며, 가죽 장갑은 클래식한 분위기를 강조한다. 베레모나 페도라를 매치하면 세련된 스타일이 완성되며, 액세서리의 색상과 질감을 고려해 조화롭게 연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트렌치코트로 이름난 다섯 브랜드와 그 디자인 특징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트렌치코트라는 개념을 시작한 기업으로 간주되는 버버리는 지금까지도 유력한 브랜드다. 클래식한 트렌치코트의 전형을 제시한다. 프록코트 형태를 계승한 더블 브레스티드 디자인과 허리 벨트, 체크무늬 안감이 특징이다.

아쿠아스큐텀은 영국 왕실이 사랑한 브랜드로, 방수 코트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단정한 실루엣과 고급스러운 울 혼방 원단이 강점이다. 마르지엘라는 현대 해체주의적 감각을 더해 트렌치코트를 실험적으로 변형한다. 과장된 어깨선, 독특한 버튼 배열, 러프한 커팅 등이 특징이다.

발렌시아가는 오버사이즈 실루엣과 독창적인 패턴으로 트렌치코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구조적인 디자인과 강렬한 볼륨감이 돋보인다. 마지막으로 로로 피아나는 최상급 캐시미어와 울을 사용해 고급스러운 트렌치코트를 제작하는데, 부드러운 촉감과 가벼우면서도 따뜻한 착용감이 특징이다.

트렌치코트는 단순한 외투가 아니다. 이는 시간을 초월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산이며, 격동의 시대를 뚫고 살아남은 가치적 상징이다. 전장의 진흙에서 태어나 도시를 지배한 이 옷은 변함없는 품격과 실용성을 동시에 갖췄다. 시대가 변하고 제아무리 유행이 바뀌어도, 트렌치코트는 결코 퇴색하지 않는다. 여러분의 옷장에 한 벌쯤 이 불멸의 아이템을 자리하게 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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