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예술
Artist Studio 18. ‘홍지윤 스타일’ … 경계 없이 넘나드는 형형색색의 에네르기
그래픽·사진·미디어파사드 등
다양한 장르 결합 혁신적 시도
독창적인 ‘퓨전 동양화’ 이끌어내
형광색·원색 과감히 사용
‘색동 꽃’과 ‘색동 새’ 이미지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매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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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윤 작가의 작업실은 분주하고 힙한 동네, 이태원의 메인 도로 상가 건물에 있었다. 이런 번화한 동네에 작업실이?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작업실에 이르는 계단을 올라 문을 여니 앨리스의 토끼굴로 빠져들어 간 듯 신비로운 공간이 펼쳐졌다. 각종 화분과 가구들로 꾸며진 작가의 스튜디오는 벽을 가득 채운 드로잉과 작품의 일부인 오브제, 대형 캔버스로 가득 찬 그야말로 ‘홍지윤 월드’였다.
세로형의 긴 공간이 무빙월로 작품 수장 공간과 작업 공간으로 분리돼 있다. 작품 수장 공간에 가지런히 정돈된 작품들은 작가의 엄청난 작업량과 견고한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대한 아카이브와 같았다. 공간은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을 닮는다. 작가의 스튜디오는 홍지윤의 에너지와 바이브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다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홍지윤은 어머니가 운영하던 의상실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화려한 옷감과 패션잡지, 화집을 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예원학교를 거쳐 홍익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며 정통 동양화 교육을 받았으나 ‘동양화단의 이단아’ ‘매체를 넘나드는 동양화의 매체 실험과 확장’ ‘전통과 디지털의 크로스 오버’ 등 작가 홍지윤을 표현하는 수식어는 다소 혁신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동양화를 기반으로 하되 형광색과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그래픽·사진·영상·설치·퍼포먼스·미디어파사드 등 다양한 장르와 매체를 오가며 결합하는 식으로 최초의 시도를 이어 온 행보가 그 연유일 것이다.
그러나 홍지윤 작업의 중심에는 ‘서화동원(書畵同源)’과 ‘시서화일체(詩書畵一體)’ ‘지필묵(紙筆墨)’을 기본으로 하는 동양화의 화론이 자리잡고 있다. 동양화의 기본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예술적 변용과 매체의 융합을 선보이는 것, 전통을 바탕으로 동양화의 현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홍 작가의 오랜 고민이었으며, 그 답으로 내놓은 것이 ‘퓨전 동양화’다.
‘퓨전 동양화’는 모든 존재가 서로 방해됨 없이 융합해 거리낌 없는 상태를 일컫는 ‘원융무애(圓融無碍)’의 동양적 정서를 예술철학으로 삼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다원적 융합·변용의 방법론이다. 초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매체 융합에서 출발해 동서고금의 인문과 다중매체와의 융합으로 확장돼 대형 설치 작업, 미디어파사드와 공공미술 등 작가의 모든 활동을 아우르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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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작가가 ‘퓨전 동양화’를 제시하게 된 연원을 추적해 가면 2000년대 동양화와 기술 매체를 접목하기 시작한 시기에 가 닿는다. 수묵화와 채색화를 통해 현대 동양화의 길을 모색하던 홍 작가는 2001년 연세디지털할리우드 과정에 등록해 3D 애니메이션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밀레니엄을 앞두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흐름을 놓치지 않겠다는 작가적 욕심과 ‘동양화가 아닌 것’으로부터 동양화 돌아보기를 위한 시도로 시작됐고, 결국 그 돌파구가 됐다.
홍 작가는 글씨(자작시)와 그림, 먹과 아크릴, 수채 물감 등을 혼합해 그린 여러 장의 수묵 그림으로 구성된 ‘수묵 영상’으로 동양의 시서화(詩書畵)가 디지털 기술과 만나 변모하는 과정을 선보였는데, 이것이 ‘퓨전 동양화’의 시작이었다. 이후 ‘수묵 영상’은 작가의 고유한 형식이 돼 다양한 작품에서 설치, 퍼포먼스 등과 결합하는 등 확장되고 있다.
홍지윤은 2000년대 후반부터 선명한 원색과 형광 색상을 사용하며 동양화 규범을 넘어서는 독창적이고 확장된 ‘퓨전 동양화’를 선보였다. 이 시기 등장한 ‘색동 꽃’과 ‘색동 새’ 이미지는 작가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형광색의 크고 둥근 모양의 꽃은 전통의 오방색(五方色)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동서고금의 문화를 밝고 활기차게 아우르는 긍정적 융합의 아이콘이다.
이는 동양과 서양, 음과 양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겹’에 주목하는 것으로, 수많은 꽃잎이 모여 하나의 꽃을 이루는 모습을 통해 융합을 추구하는 은유의 형상이다. 이와 더불어 작업 재료도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동양화 모필에 듬뿍 찍어 호방하게 그려내며, 작업의 내용과 형식 양 측면에서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의 융합을 이뤄냈다.
이상, 윤동주, 단테 등 문학가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문학적 모티브와 자작시는 홍지윤 작업의 또 다른 한 축이다. 홍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 시를 쓰는 시간을 갖는다. 그림과 함께, 혹은 그림보다 먼저 시가 자리를 잡는다. 자작시와 문학작품, 유행가 가사로 캔버스를 가득 메우기도 하고, 시구가 그림 일부로 자리 잡기도 한다.
이렇게 글과 그림이 하나로 어우러진 화면은 동양의 시서화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독자적인 작품세계로 구축됐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글씨는 텍스트로서 내용 전달을 넘어, 문학적 상상력과 감성을 그림 속에 녹여내고 있다. 글씨는 작가의 사유와 감정을 드러내며, 전통 서예 기법을 바탕으로 현대적 감각을 더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체로 역할한다.
최근 금호미술관에서 30년 작품세계를 풀어낸 작가는 아이패드를 이용한 드로잉 신작을 선보였다. 디지털 기기와 기술의 활용에 능한 작가이지만 이번 작업은 기존과 정반대의 접근이다. 아이패드에서 정사각형 화면에 동양적 선묘에 적합한 디지털 브러시를 골라 그린 그림을 다시 캔버스에 수작업으로 옮겨왔다.
디지털 기기로 그려진 회화적 그래픽이 그래픽적 회화로, 디지털적 아날로그로 전환된 것이다. 온·오프라인에서 그려진 여러 색동 꽃은 매끈한 디지털적 마무리와 붓 터치의 속도감, 물감의 물성과 같은 매체 특성을 드러내는 등 디지털과 아날로그 감성 사이를 오가며 이전 작업과의 연결 지점을 이어갔다.
이렇듯 홍지윤은 전통을 바탕으로 동시대적 감각을 확보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 언어를 지속적으로 확장해 왔다. 매체를 가로지르는 ‘퓨전 동양화’의 실험은 장르적으로도 확장돼 영상·설치·퍼포먼스·공공미술을 아우르고 패션·출판 업계, 미술관과의 아트 컬래버레이션, 기업과의 협업으로 패키지·마케팅 디자인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펼쳐서 대중성을 확보해 왔다.
특히 2017년 광화문에서 선보인 평창올림픽 기념 미디어파사드 작업을 통해 공공적 참여와 소통으로 홍 작가의 작품은 우리 삶 속으로 한층 가까이 다가왔다. 홍지윤의 작업에는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추상과 구상, 정신과 물질, 삶과 죽음, 아날로그와 디지털 등 양가적인 것들이 융합, 공존하며 ‘퓨전 동양화’는 한층 나아가 ‘홍지윤 스타일’로 확장되고 있다.
홍지윤은…
홍지윤(1970)은 홍익대학교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첫 번째 개인전 이후 한국·중국·영국·독일 등에서 23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피렌체 비엔날레에서 ‘로렌조 일 마그니피코’상을 두 차례 받았으며(2001·2003),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올해의 주목할 예술가상’(2012), 서울문화재단 ‘중진작가상’(2014) 등을 수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리움미술관, 뮌헨문화부 등 유수 기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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