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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인 10분의 1이 목숨 걸고 만세 외쳤다

입력 2025. 02. 27   17:19
업데이트 2025. 02. 27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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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6주년
데이터로 살펴본 그날의 의미

1680만 명 중 최소 106만여 명 참여
시위 주체 일반 대중 1020건 최다
독립선언서도 200개 넘게 나와
만세 1671건·집단항의 252건 등 
총 1798건 시위 평화적으로 진행
재외동포 동참…국외 시위 115건
미·중 언론 등 세계 주목 끄는 계기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일, 독립의 열망을 담은 거룩한 함성이 방방곡곡에 울렸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족의 외침은 한반도를 넘어 대륙으로, 바다 건너 미국과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자 시대 변혁을 불러온 민족의 한목소리였다. 3·1운동 106주년을 앞두고 우리의 숭고한 역사를 되새기며,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조명한다.

국외 독립운동 지역과 만세시위 횟수.
국외 독립운동 지역과 만세시위 횟수.



동시다발적·시간적·지역적·계층적 확산 

3·1운동은 동시다발적이면서 들불처럼 퍼진 항일투쟁이었다. 신분·계층·지역을 아우르며 시대 변혁을 이끌었고, 국제사회에 강한 울림을 주며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알렸다.

3·1운동은 학생 시위에서 점차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했다. 시위의 중심은 학생과 지식인 계층이었다. 3·1운동 초기 지속된 서울 시위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한 계층도 이들이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며 주도 계층은 농민·상인·노동자 등 일반 대중으로 넓어졌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3·1운동 시위는 총 1798건이었다. 이를 열흘 단위로 보면 3월 1일부터 10일까지는 248건, 11일부터 20일까지는 299건이었다. 그다음 열흘은 506건, 이후 열흘은 591건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번지다가 4월 10일 이후 소강상태를 보인 것. 전국적으로 하루 평균 50~60회의 시위가 벌어진 셈이다.

서울·경기도가 415건으로 가장 많았다. 평안도가 276건, 경상도가 273건으로 그 뒤를 이었다.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황해도 등 전국 각지에서도 발생했다.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해 초순엔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3월 11~20일에는 남부지역으로 확산했고, 3월 21일~4월 10일 전국적으로 퍼지며 절정에 달했다. 

시위 주체 유형을 보면 일반 대중이 1020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예수교 349건, 천도교 234건, 학생 262건, 관공리 35건, 노동자 28건, 교사 20건 등이었다. 불교, 유생, 상인이 주체가 된 시위도 일어났다.

이 시기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20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는 106만7886명으로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간한 『한일관계사료집』에선 168만1648명으로,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선 202만3098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기·장소 등 산정기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1919년 우리나라 인구는 약 1680만 명이었는데, 노약자 등을 제외한 청·장년층 비율을 고려하면 얼마나 많은 이가 시위에 나섰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제의 탄압도 있었다. 일제 경찰·헌병기구가 전국에 산재해 있었으며 평화적인 3·1운동 시위에도 발포를 서슴지 않았다. 발포 횟수는 서울·경기도 57회, 경상도 47회, 충청도 39회 등 전국적으로 250회가 넘었다.

이 시기 나온 독립선언서는 200개가 넘는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외에 전국 곳곳에서 개별적인 상황에 따른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당시 기록을 종합하면 3·1운동은 서울을 중심으로 확장해 나가면서 전국에서 동시에 일어난 시위였다. 지역마다 크고 작은 시차가 있었지만, 시위 성격과 흐름은 동시다발적이었다.

 



시대 변화 견인·세계에 독립 정당성 알려

3·1운동이 사회 변화를 불러왔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신분제가 사회구조의 바탕이었던 당시 3·1운동은 신분·계층·지역을 초월한 민족의 일치단결을 이뤄 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거룩한 함성 앞에 민족 모두가 평등했고, 그 의지는 확고했다.

삼일운동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3·1운동 행동양상별 시위는 만세 1671건과 집단항의 252건 등이었다. 매체별 유형은 구호가 1074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깃발 442건, 문서 193건, 노래 27건 등이었다. 기본 유형에서는 시위 자체가 1798건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평화적 시위였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3·1운동은 대한독립을 알리며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를 만들었다. 1910년 대한제국 국권 상실을 거쳐 전개된 3·1운동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불러왔던 것. 제국의 시대에서 민국의 시대로, 신민(臣民)에서 국민(國民)으로 변화를 이끌었다.

사실 독립운동단체들의 임시정부 수립 논의는 3·1운동 이전부터 있었지만, 3·1운동에서 나타난 민족의 열망은 독립의지를 하나로 뭉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3·1운동의 거센 물결은 국외에 거주하던 한국인에게도 파급됐는데, 총 115건의 시위가 국외에서 전개됐다. 만주 86건, 북미 11건, 연해주 11건, 중남미 2건, 러시아 2건 등 대륙과 지역을 가리지 않았다.

우리 독립운동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미국은 3·1운동을 계기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국 언론은 3·1운동을 연일 보도했다. AP통신과 뉴욕타임스는 1919년 3월 12일부터 독립운동 상황을 다뤘다. 한국민의 용기와 일제의 만행을 상세히 알렸다.

중국 신문들도 3·1운동을 크게 보도했다. 대표적으로 상하이국민일보는 1919년 3월 12일부터 중국 5·4운동이 발생한 5월 4일까지 20회 이상 기사를 내보냈다. 이틀에 한 번꼴로 우리 독립운동을 다룬 셈이다. 중국 영자신문인 베이징데일리뉴스는 거의 매일 소식을 전했다. 중국 언론의 보도 내용은 3·1운동 과정에서 일제의 폭력진압을 비난하고, 중국민들도 3·1운동을 본받아 일제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 많았다.

서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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