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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 기억될 역사, 기억할 영웅

입력 2024. 06. 04   17:14
업데이트 2024. 06. 0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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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나이 아흔 셋 - 3만9200여 명, 그들의 시간 멈추기 전에 알아봐 주길

6·25전쟁 전후에도 참전유공자는 탄생했다?

흔히들 6·25전쟁 참전유공자라고 하면 ‘군인’을 떠올린다. 하지만 군인 외에 다양한 사람이 포함된다. 당시 치열했던 전투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참전했기 때문이다.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참전유공자법) 제2조에 따르면 6·25전쟁에 참전하고 전역(퇴역, 면역 포함)한 군인, 6·25전쟁에 참전하고 퇴직한 경찰공무원, 병역의무 없이 참전한 소년지원병 등 6·25전쟁에 참전한 사실이 있다고 국방부 장관이 인정한 사람, 경찰서장 등 경찰관서장의 지휘·통제를 받아 6·25전쟁에 참전한 사실이 있다고 경찰청장이 인정한 사람 등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6·25참전유공자가 전쟁 전후로도 탄생했다는 것이다. 참전유공자법에 따르면 6·25전쟁이란 발발일인 1950년 6월 25일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 사이 발생한 전투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서가 붙는다. 1948년 8월 15일부터 전쟁 발발일 전까지와 정전협정 체결 이후부터 1955년 6월 30일 사이 발생한 전투 중 공비토벌, 여수반란 진압작전 등도 6·25전쟁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간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영웅이 존재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정부에서는 그동안 미등록 참전유공자 발굴 캠페인을 전개하며 숨은 영웅 찾기에 두 팔을 걷고 적극 나섰다.


6·25참전유공자 90만 명에서 3만9200여 명

아쉽게도 정확한 참전유공자 숫자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전후 시간이 흐르면서 앞서 언급한 공비토벌 등 대상이 확대됐다는 점도 있지만, 비전투·비군인 참전으로 자신이 대상인지 모른 채 지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중 비군인참전자는 근무사단예비장병, 국민방위군, 군무원, 유격대원, 애국단체대원, 학도의용군, 철도·소방·법무공무원, 교직원, 종군예술단원, 종군기자 등을 말한다. 참전유공자 예우와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이 개정됨에 따라 1995년 3월부터 비군인 신분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어도 참전유공자로 인정받게 됐다.

특히 미등록 참전유공자 발굴 캠페인 이전에는 본인이 직접 신청해야만 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참전 관련 자료가 병무청 등 각급 기관에 산재해 있어 이를 종합적으로 수집·분석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또 6·25전쟁 당시 주민등록번호 체계가 없고, 기준등록지 등의 한문 수기로 신상 확인이 곤란하기도 했다.

다만 정부가 미등록 참전유공자 발굴 캠페인을 전개할 때 6·25전쟁 참전군인을 90만 명이라고 밝힌 점 등을 놓고 봤을 때 참전유공자 수는 최소 90만 명으로 추산된다.

1997년 7월 14일 열린 한국참전단체총연합회 창립총회에서 6·25참전단체 회원 수가 78만6000명에 달한다는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유공자회) 기록을 봐도 수치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분석된다.

국가보훈부 참전유공자 등록 현황과 유공자회가 최근 발간한 『20년사』에 따르면 올해 생존 6·25전쟁 참전유공자 수는 3만9200여 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93세의 고령이라는 점에서 생존 참전유공자 수는 더욱 가파르게 줄어들 전망이다. 이 중 100세 이상은 314명, 99~95세는 5406명, 94~90세는 2만7785명으로 생존 참전유공자의 약 85%를 차지한다. 2003년 2600명 수준이던 참전유공자 사망자 수는 2023년 4500명으로 2배가량으로 뛰었다. 고령과 질환으로 세상을 달리하는 참전유공자 수가 빠르게 늘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한민족의 가슴 아픈 전쟁을 직접 몸으로 겪은 역사의 산증인을 마주할 기회가 이제 우리에겐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6·25참전유공자회 탄생과 역사

6·25참전유공자를 말하면서 유공자회를 빼놓을 수는 없다. 전후 다양한 6·25참전단체가 생겨났다. 특히 1997년 한국참전단체총연합회가 결성됐으나 여전히 몇몇 단체가 통합되지 않아 참전용사의 명예와 복지 및 권익 증진에 한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이런 여론에 따라 대한민국재향군인회(향군)는 2000년 5월 23일 이상훈 회장 주재로 6·25참전단체 대표 간담회 등 여러 차례 통합준비회의를 개최했다. 그 결과 같은 해 8월 4일 창군 및 6·25참전동지회, 한국전쟁참전자회, 6·25참전용사회, 육·해·공군 6·25참전동지회 등 4개 참전단체 회장이 모여 통합각서에 서명함으로써 대통합이 가시화됐다. 그리고 다음달 21일 향군회관 대강당에서 단체 대표와 회원 1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6·25참전단체 통합총회가 열리면서 현재의 유공자회 모체인 ‘6·25참전전우회’가 설립됐다. 이후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를 거쳐 현재의 유공자회로 개칭됐다.

유공자회는 6·25참전유공자의 명예선양 및 복지 증진과 권익 신장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함과 동시에 통합 단체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참전군인’으로만 예우받던 것을 ‘참전유공자(국가유공자)’로 격상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전유공자회 주도 안보의식 함양

각종 참전기념물 설립 앞장서고
청소년 호국정신 고양에도 기여

활동 나이는 청춘 - 70년 전 조국 위해 총 들었고 70년 후 안보 위한 목소리 높여

참전유공자의 활동 

평균 93세의 고령임에도 6·25전쟁 참전유공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특히 전쟁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와 국가수호의 소중함을 체득한 6·25참전유공자들은 핵실험과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전 등 북한 도발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들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지켜온 영웅으로서 국민 안보의식 함양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런 활동의 구심점에 참전유공자회가 있다. 참전유공자회는 2010년부터 6·25전쟁 바로 알리기 교육에 나서고 있다. 이 교육은 6·25전쟁의 실상과 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영향을 깨닫고 오늘의 번영과 자유가 참전유공자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리기 위해 추진됐다.

이와 함께 참전유공자회는 청소년이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깨닫고 몸과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을 키우도록 하기 위해 6·25전쟁 기념일 전후로 6·25전쟁 상기 웅변대회를 열고 있다. 이와 함께 골든벨 형태의 퀴즈대회, 호국문예 백일장, 사생대회 등을 개최해 청소년의 호국정신과 안보의지를 고양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6·25호국정신 알리며 안보의식 제고 

참전유공자회는 6·25호국정신을 잇기 위해 각종 참전기념물 설립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8년 개관한 화령장전투전승기념관도 결과물 중 하나다. 참전유공자회는 2012년 상주시에 6·25전쟁 상주 화령장전투 전승을 영원히 기념하며 후세에게 나라사랑의 학습장이 될 수 있도록 기념관 건립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상주시에서는 2012년 12월부터 육군본부와 협조하면서 실무 검토를 하기 시작했다. 참전유공자회도 적극 거들면서 기념관 내부에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상주시에 조언했다. 그 결과 경북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 일원의 2만6391㎡ 부지에 건축 연면적 2만772.54㎡ 규모의 기념관이 조성됐다. 이런 영향을 받아 지난 3월 상주시는 기념관을 지나는 도로 4.5㎢ 구간을 ‘화령장전투전승로’로 명예도로명을 부여했다. 호국영웅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상주시의 첫 번째 명예도로명이다.

철의삼각지대전투 전몰장병 추모비 또한 참전유공자회가 주도해 설립됐다. 참전유공자회는 휴전을 앞두고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던 철원군 일대 철의삼각지대전투에서 산화한 호국영웅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추모비 건립에 나섰다. 다행히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적극 호응하면서 참전유공자회원들이 모은 성금(3억600만 원)과 국가보훈부(3억2400만 원), 철원군(4억5000만 원) 예산이 투입돼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중강리 일대에 2012년 추모비가 세워졌다.

이 밖에 지속적인 전사 연구를 통해 전쟁영웅을 발굴해 무공훈장을 추서하도록 하는 등 명예선양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6·25전쟁 관련 학교 교육

초·중·고 교과서 2~4쪽 분량 그쳐
‘누구와 싸운 전쟁’인지도 몰라
아무리 태평해도 전쟁을 잊으면
위기 다시 올 수 있어
국가관·안보관 확립 나설 것

인터뷰 - 이상노 6·25참전유공자회 교육부장 
“천하수안 망전필위 잊지 말아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과 우리의 기억에서 점차 잊히고 있는 6·25전쟁을 후손에게 전수해야 한다는 노병들의 절박한 마음이 바탕이 돼 2010년 5월부터 전국 초·중·고교, 학군사관후보생을 대상으로 6·25전쟁 바로 알리기 교육을 펼치고 있습니다.”

육군 정훈장교로 30여 년 근무한 뒤 현재 참전유공자들과 교육에 나선 이상노(예비역중령) 교육부장은 유공자회가 6·25전쟁 바로 알리기 교육을 시작한 이유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 부장은 “역사적 의미가 큰 6·25전쟁을 학교 교육에선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출판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초등학교 5학년 사회과목에서 4쪽 내외 분량으로 언급하고 있고, 중·고교 한국사 과목에서는 2~3쪽 분량의 개괄적 내용으로만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6·25전쟁은 누구와 싸운 전쟁인가라는 질문에 일본군과 싸운 전쟁이라고 답변하는 학생이 있을 정도로 6·25전쟁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는 걸 느낀다”며 “호국·애국·자유수호의 6·25정신을 후세에 전수하는 6·25전쟁 바로 알리기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교육은 전문 안보교수 5명이 전국의 참전유공자들과 함께 전국 초·중·고교, 학군단을 방문해 진행한다. 참전유공자의 생생한 전쟁 경험담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과 함께 최근에는 교육부 후원명칭 사용을 승인받으면서 5월 30일 기준 지난해보다 29개 학교가 더 신청하는 등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 부장은 교육이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국가관·안보관 확립에 큰 도움이 된다고 역설했다.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는 이 부장은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최신 트렌드에 맞춰 교육자료를 수시로 손보는 건 물론,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요즘 학생들이 쓰는 말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순수 강의만으로는 학생들과 ‘라포’(신뢰관계)를 형성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참전유공자들이 대부분 고령이라 이제 이렇게 역사를 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청소년들이 참전유공자에게서 직접 교육받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인 만큼 효율적인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끝으로 그는 아무리 태평해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기가 온다는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亡戰必危)’란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특별기획팀  글=임채무·박상원/사진=이경원·양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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