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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 못할 정도로 청년 몰려…군사교육 속성반 개설

입력 2024. 05. 13   18:11
업데이트 2024. 05. 13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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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군인들 - 44. 신흥무관학교의 교관들 

신민회 간부 주축 사관 양성기관 설립
만주 지역서 가장 많은 독립군 키워내
3·1운동 후 일 대대적 와해공작에 폐교
졸업생들 항일무장단체로 흩어져 활약
군사교관 지낸 김창환·이관직·이장녕
학교 초창기부터 평생 독립운동 몸 바쳐

(왼쪽부터) 김창환 출처=독립기념관, 말년의 이관직 출처=이회영기념관, 이장녕 출처=국가보훈부
(왼쪽부터) 김창환 출처=독립기념관, 말년의 이관직 출처=이회영기념관, 이장녕 출처=국가보훈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에 참패를 안겼던 일이 운이 좋았거나 우연이었을까?

아니다. 독립군이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독립군을 체계적으로 훈련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대한제국의 무관 출신이었다.

비록 나라가 사라졌어도 대한제국의 수많은 무관이 끝까지 군인의 본분을 지켰다. 그들은 압록강 북쪽 지역인 서간도(西間島)와 두만강 북쪽 일대인 북간도(北間島)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만주에서 가장 많은 독립군을 배출한 사관 양성학교는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였다. 1911년 6월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9년여 동안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주역은 이회영 6형제, 이상룡, 이동녕, 김동삼 등 신민회 간부들이었다. 이들은 1910년 말부터 1911년 초 사이에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미개척의 산골짜기인 지린(吉林)성 류허(柳河)현에 독립운동기지인 삼원보를 세웠다.

그곳에 모인 신민회 간부들과 300여 명의 이주민이 1911년 5월에 교민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6월에는 사관 양성학교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의 문을 열었다. 1912년 봄에는 독립운동기지를 삼원보에서 남쪽으로 90리쯤 떨어진 퉁화(通化)현 하니허(哈泥河)로 옮기고 새 자치기구인 부민단(扶民團)을 결성했다. 신흥강습소도 새 교사를 신축하고 학교 이름을 신흥학교로 개칭했다.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은 이동녕, 교감은 김달, 학감은 윤기섭이었다. 이갑수, 이규룡, 장도순 등이 교사를 맡았다. 군사학을 교육할 교관에는 김창환 부위(중위), 이관직 부위, 이장녕 부위 등 대한제국군 출신들이 임명됐다.

신흥강습소에서 가르친 교육은 일반교육 과정인 본과와 1년 속성 과정인 특과가 있었다. 일반교육과 기초군사훈련을 가르친 본과는 윤기섭·장도순·이규룡 등이, 전문적인 군인을 양성하는 과정인 특과는 김창환·이관직·이장녕 등이 담당했다.

신흥중학교로 개칭한 뒤에는 본과 3년에 집중군사훈련 과정 1년을 더해 4년제 교육체계가 정착됐다. 1918년에는 조성환 참위(소위)가 교관으로 합류했다. 1919년엔 신팔균 정위(대위), 일본 육사 출신 김경천 중위와 이청천 중위도 합류해 학생들을 더욱 체계적으로 훈련했다.

 

‘신흥무관학교’가 ‘신흥강습소’로 불렸다는 내용이 수록된 ‘신흥교우보’ 2호 목차 페이지. 연합뉴스
‘신흥무관학교’가 ‘신흥강습소’로 불렸다는 내용이 수록된 ‘신흥교우보’ 2호 목차 페이지. 연합뉴스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외에 독립 열기가 고조됐고, 국내에서 망명한 수많은 조선인 청년이 부민단 본부로 찾아왔다. 그해 4월 부민단은 류허현과 퉁화현은 물론 싱징(興京)·환런(桓仁)·지안(輯安)현 등 각 현의 조선인 지도자들과 협의해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하고 산하 군사단체로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했다.

신흥학교도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는 류허현 구산쯔(孤山子)로 학교 본부를 이전하고 교명을 신흥무관학교로 바꿨다. 너무 많은 청년이 학교로 찾아와 4년제 과정으로는 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학교 측은 6개월의 속성 군사교육 과정을 만들어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 과정을 속성과(速成科) 또는 속성반(速成班)이라고 했다.

그해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정부가 세워진 직후 한족회의 군사단체인 군정부가 임시정부 산하 조직으로 들어가면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명칭을 바꿨다. 서로군정서의 장병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됐다.

3·1운동은 항일무장투쟁에도 불을 붙였다. 만주 지역에서 크고 작은 무장단체가 생겨나 항일무장투쟁을 개시한 것이다. 이처럼 독립군이 일어나자 일본이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을 움직여 와해공작에 들어갔다.

1920년 1월 일본의 사주를 받은 장쭤린이 한족회의 해산을 명령했다. 5월부터는 일본군과 합동수색대를 편성해 독립운동 근거지를 습격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했다. 이 때문에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경 폐교되고 만다.

하지만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만주 전역으로 퍼져 나가 각종 항일무장단체의 핵심 세력으로 활약했다. 북간도까지 진출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병사들을 훈련했으며, 청산리전투에도 참전해 큰 전공을 세웠다. 또한 만주 각지에 설립된 민족학교에서 애국청년을 양성했다. 1940년 9월에 창설되는 광복군의 주역도 바로 이들이었다.

그렇다면 신흥강습소 초창기에 학교 기반을 세우고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한 교관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신흥강습소의 훈련감이었던 김창환(金昌煥·1872~1937) 부위는 1922년에 조직된 대한통의부의 직할부대인 의용군(義勇軍)의 사령장, 1930년 창설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부사령을 맡아 활약했다. 이청천, 유동열 등과 함께 조선혁명당의 간부로 일하던 1937년 안타깝게도 과로로 별세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관직(李觀稙·1883~1972) 부위는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신민회에 참여해 구국 계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민회 간부들이 서간도에서 독립운동기지를 세울 만한 장소를 물색할 때부터 깊이 관여했다. 1910년 9월 이회영, 이동녕, 장유순 등과 함께 백지(白紙) 장수로 위장하고 서간도 일대를 시찰한 것이다. 신흥강습소가 설립되자 군사교관으로 활동했으며, 1916년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내로 귀환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배재학당의 학생 동원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45년에 광복이 되자 고향인 충남 공주로 돌아가 기독교 집사로 신앙생활을 했다. 89세 때인 1972년 세상을 등졌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장녕(李章寧·1881~1932) 부위는 신흥무관학교 창설부터 폐교 때까지 ‘학교의 지킴이’였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관과 학도단장을 거쳐 교장 대리까지 역임했다. 그뿐만 아니라 북로군정서의 장병 교육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1920년 3월 북로군정서 산하에 사관연성소를 개교한 김좌진이 이장녕을 교관으로 초빙했다. 그해 4월경 북로군정서로 옮겨 간 이장녕은 사관연성소 교관을 맡아 생도들을 교육했으며, 청산리전투에도 참전했다.

이후 대한독립군단의 참모총장, 만주에 설립된 조선인 자치정부인 신민부(新民府)의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32년에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에 가족과 함께 살해됐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필자 김선덕은 32년간 국방일보 기자, 국군영화 감독, 국방TV PD로 봉직한 군사연구가. 현재 공군 역사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필자 김선덕은 32년간 국방일보 기자, 국군영화 감독, 국방TV PD로 봉직한 군사연구가. 현재 공군 역사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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