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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탁 생도들 “끝까지 잘 배워 독립운동” 맹세

입력 2024. 04. 15   15:16
업데이트 2024. 04. 1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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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군인들 - 40.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

1909년 일 육군중앙유년학교 44명 입교

안중근 의거 후 교내 적대감 시달리기도
망국 비보 들리자 한데 모여 거취 논의
졸업 후 군복 벗고 광복 총궐기 결의
지석규·조철호·이종혁 등 4인 약속 이행
나머지는 눌러앉거나 사회로 흩어져

 

1910년 당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재학 중이던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와 일본인 교관들. 출처=김정렬 장군 회고록
1910년 당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재학 중이던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와 일본인 교관들. 출처=김정렬 장군 회고록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했다. 현재의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에 해당하는 군부(軍部)와 육군무관학교만 형식적으로 남겨 놓았다. 하지만 일제는 대한제국군의 마지막 숨통까지 끊어 버렸다. 1909년 7월 30일 순종 황제가 ‘군부와 무관학교를 폐지’한다는 칙령을 내린 것이다.

당시 재학생은 1학년 23명, 2학년 22명 총 45명이었다. 2학년은 1907년 12월에 입교했으며, 1학년은 1908년 12월에 입교했다. 학년당 25명씩 선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도들이 하나둘씩 자퇴하기 시작했다. ‘군대 없는 나라의 장교’가 될 생각을 하니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7월 무렵까지 5명이 학교를 떠났다.

8월 2일 이희두 교장이 생도들을 모아 놓고 순종의 칙령을 대독했다. 그동안 군부가 맡았던 업무를 궁중에 신설되는 친위부(親衛府)에서 관장하고, 사관 양성은 일본 정부에 위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무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생도들은 도쿄의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에 편입하게 됐다. 생도들은 일본으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몇몇 생도는 일본행을 거부하겠다고 했지만, 생도 대부분이 일본에 유학해 선진 군사학을 배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09년 9월 7일 마지막 무관학교 생도들이 도쿄에 자리 잡은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입교했다. 일본행을 거부한 1명을 제외한 총 44명이었다. 육군사관학교 바로 옆에 위치한 이 학교는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로서 수업 연한은 예과(豫科) 3년, 본과(本科) 2년 총 5년이었으며 생도 수는 700명가량이었다.
당시 전국 5개 도시에는 입학정원 50명의 지방 유년학교들이 있었지만, 그곳에선 예과 3년 과정만 가르쳤고 본과 2년 과정은 중앙유년학교에서 교육했다. 당시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수업 연한은 1년이었기 때문에 장교로서의 기초적 소양은 중앙유년학교에서 쌓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무관학교 생도 2학년은 예과 3학년에, 1학년은 예과 2학년에 편입됐다. 현재의 우리 학제와 비교해 보면 중학교 2~3학년 과정에 편입된 것이다. 조선인 편입생 44명은 한국학생반(韓國學生班)이라는 명칭으로 별도 편성됐다. 조선인 생도들은 숙소는 물론 강의실과 식당까지 일본인 생도들과 따로 사용했다.

조선인 생도들의 나이는 10여 명을 제외하고는 18세에서 21세 사이였다. 일본인 생도들보다 서너 살에서 네다섯 살까지 더 먹었다는 얘기다. 나이가 어린 데도 일본인 생도들은 조선인 생도들을 업신여겼다. 그 밑바닥엔 자신들이 일등 국민이라는 자부심이 깔려 있었다. 조선인 생도들은 나이 어린 일본인 생도들에게 지지 말자고 이를 악물었다고 한다.

조선인 생도들이 유년학교에 편입된 지 50여 일쯤 지난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에게는 조선 침략의 원흉이었지만, 일본인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구국의 영웅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수많은 민족 선각자가 검거됐다.

불똥은 조선인 생도들에게도 튀었다. 일본인 생도들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인 것이다. 일본인 생도들은 조선인 생도들과 마주칠 때마다 “야, 강(韓)꼬로, 야만인!”이라며 증오심을 드러냈다. 조선인 생도들은 불안했지만, 의연하게 대처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무관학교 생도들이 일본에 간 지 1년 만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탄되고 말았다. 생도들은 졸지에 ‘대한제국의 유복자(遺腹子)’가 됐다. 망국의 비보를 들은 조선인 생도들은 한자리에 모여 거취를 논의했다.

요코하마에 있는 한 술집에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앞으로의 거취를 토론하기도 하고, 아오야마(靑山) 묘지에서 몰래 의논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전원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하자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일본 왕의 산책 길목인 니주바시(二重橋) 앞에 가서 집단 자결해 분한 마음을 풀자고 했다.


1908년 5월 노백린(앞줄 왼쪽 셋째 앉아 있는 사람) 교장 퇴임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무관학교 생도들. 출처=김정렬 장군 회고록
1908년 5월 노백린(앞줄 왼쪽 셋째 앉아 있는 사람) 교장 퇴임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무관학교 생도들. 출처=김정렬 장군 회고록



이때 비교적 나이가 많았던 당시 22세의 지석규(池錫奎·1888~1957·26기) 생도가 “우리는 군사를 공부하러 온 사람들이니 배울 것은 끝까지 배운 다음 장차 중위로 진급하는 날 일제히 군복을 벗고 조국 광복을 위해 총궐기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결국 조선인 생도들은 나중에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맹세하고 학업을 계속했다. 후일 이들 중 자퇴하거나 중도 탈락한 11명을 제외한 33명이 일본 육사를 졸업하게 된다. 26기(1914년 5월 졸업) 13명과 27기(1915년 5월 졸업) 20명이다.

이때 끝까지 공부하자고 주장했던 지석규는 중위 때인 1919년에 자신이 공언했던 대로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이 됐다. 그가 바로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일명 이청천(李靑天) 장군이다.

조철호(趙喆鎬·1890~1941·26기)도 약속대로 1918년에 중위로 예편한 뒤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조철호는 예편 후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재직했고,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그 직후 중국으로 망명했지만, 곧 체포돼 감옥에 수감됐다. 조철호는 출옥 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1922년 한국 보이스카우트연맹의 전신인 조선소년군(朝鮮少年軍)을 창설했으며, 1941년(51세)에 병사했다. 199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이종혁(李種赫·1892~1935·27기)도 중위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해 참의부(參議府) 군사위원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8년 펑톈(奉天)에서 체포돼 5년 동안 복역했고, 옥살이 중 걸린 늑막염으로 인해 1935년(43세)에 병사했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소위 때인 1917년에 예편한 이동훈(李東勛·1890~1920·27기)은 평양 광성고보(光成高普)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3·1운동 때는 제자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했다. 1920년(30세) 상하이(上海) 임시정부로 탈출하려다 실패하고 사망했다.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하지만 이 4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딸린 가족이나 주변 환경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일본군에 그대로 주저앉거나 전역 후 일반사회로 진출했다.

내가 만약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때때로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독자 여러분도 한 번쯤 생각해 보셨으면 한다.

필자 김선덕은 32년간 국방일보 기자, 국군영화 감독, 국방TV PD로 봉직한 군사연구가. 현재 공군 역사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필자 김선덕은 32년간 국방일보 기자, 국군영화 감독, 국방TV PD로 봉직한 군사연구가. 현재 공군 역사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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