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행주산성 아래 넓은 강…그 많던 웅어는 어디로 갔을까?

입력 2024. 04. 04   16:17
업데이트 2024. 04. 04   17:15
0 댓글

구보의 산보, 그때 그곳 - 행호, 웅어가 있던 풍경

옛사람들이 호수로 여긴 한강 하류
갈대 무성해 귀한 어종 ‘웅어’ 서식
겸재 그림 속 그물 드리운 어부들
해마다 봄이 되면 임금님께 진상
위어소 두고 감착관 상주 진두지휘
환경 파괴 등으로 이젠 잊힌 생선…

 

한강하류 행주산성 아래 일대. 필자 제공
한강하류 행주산성 아래 일대. 필자 제공



웅어(熊漁)는 숭어와 함께 회유성 강 어류의 쌍벽을 이룬다. 정약전(1758~1816)이 “맛이 아주 달아 횟감으로는 상품(上品)”(『자산어보』)이라고 표기했고, 효심이 깊었던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상에도 올린 생선이다(『을묘원행의궤』).

서해안과 남해안 강 유역에서 주로 서식한다. 조선시대에는 팔도의 “38개 현에서 특산물로 잡혔다”(『신증동국여지승람』). 1454년에 펴낸 『세종실록지리지』는 “한강 하류 고양이 웅어의 명산지”라고 기술한다. 행호(幸湖)를 일컬음이다. 행주산성 아래 넓은 강을 옛사람들은 호수로 여겼다. 이 행호에는 갈대가 무성해 웅어들이 서식하기에 좋았다.

4월에 산란기를 맞아 바다로부터 한강 하류로 올라와 조수가 드나드는 ‘갈대밭에 알을 낳는다’ 하여 옛사람들은 갈대 ‘위(葦)’ 자를 써 ‘위어(葦魚)’라는 속명으로 불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겸재 정선(1676~1759)은 행호에서의 웅어잡이를 『행호관어도』에 남겼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 속에는 7척씩 대오를 이룬 웅어잡이 배들마다 두세 명씩의 어부들이 그물을 드리우고 있다. 그림 옆에 이런 찬(贊)이 있다.

“늦봄에는 복어국 초여름엔 웅어회라 복사꽃 가득 떠내려 오면 행호에 그물 치기 바쁘네.”

가만히 들여다보는 구보의 귓가에 어부들의 노랫가락이 바람에 실리고,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그물 속에는 은빛 웅어들의 파닥거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겸재가 그린 행호관어도. 필자 제공
겸재가 그린 행호관어도. 필자 제공



웅어는 5월을 전후한 두 달여의 짧은 시기에만 맛볼 수 있는 귀한 어종으로서 조선시대 임금님 수라상에도 올랐다. 웅어가 “왕이 사는 곳을 그리워한다”는 전설을 갖는 배경이다. 4월이면 웅어 진상을 위해 궁중 음식부서 사옹원이 고양 교하 김포 통진 양천 등 한강 하류 5개 지역에 위어소(葦魚所)를 두었고, 감착관들이 행주나루에 상주하면서 진두지휘했다(『송남잡지』·조재삼).

관원들은 왕족과 자신의 연줄인 재상들에게도 상납하기 위해 어부들을 닦달했다. 잡은 웅어는 사옹원이 관리하던 한강 변 석빙고에 저장했다. 멸칫과 생선들이 그렇듯 잡힌 후에는 곧 죽어버려 즉시 염장하거나 얼음에 재워 보관해야 하는 까닭이다. 생선이 맛을 잃으면 관원이 처벌을 받았다. 구보의 눈에 그물을 부리고 상품을 가려 소금을 치고 석빙고로 옮기느라 부산을 떠는 광경이 그려진다. 배 가득하도록 잡고도 겨우 하품만 챙겨서는 그나마도 강가에서 기다리던 상인들에게 넘기는 어부들의 모습도 잡힌다.

“생선장수들이 대나무 소쿠리에 담아 참나무 잎사귀로 덮어서 지게에 지고선 골목을 누비고 돌아다니며 ‘우-ㅇ어!’라고 외쳤다”(『경도잡지·유득공)라고 하니 그 풍경만큼은 정겹게 다가온다. 구보는 노역을 해야 하는 어부들에게는 웅어가 지긋지긋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바쁜 모내기 철에 진상품 잡느라 고생하고서도 떨어지는 건 얼마 없으니 봄이 오는 게 괴로웠을 터다.

“어부의 역(役)이 백성들 가운데 가장 과중하니 세제 혜택을 더 주어야 한다”(『인조실록』·1625.2.19.)라고 사옹원이 계를 올린 데서도 확인된다. 민간에서는 국가진상품인 웅어 대신 사촌 격인 ‘싱어(細魚)’를 먹었다. 구보는 웅어 작황이 좋지 않자 진상 담당 봉진관이 모양은 비슷하나 크기가 작은 싱어를 섞어 올리다가 들켜 문초당하게 되는 기록을 접하면서 코미디라고 여긴다(『인조실록』·1640.4.11.).


웅어.
웅어.



웅어는 금강, 영산강, 낙동강에서도 서식했다. 낙동강 유역은 갈대가 무성한 하단과 삼랑진에서 많이 잡혔다. 밀양 태생인 구보는 어린 시절 밀양강의 또 다른 명물인 은어(銀魚)와 이 생선을 자주 혼동하곤 했다. 모양은 둘 다 은백색이어서 가려내기 어려웠지만, 은어가 짙은 수박 향을 품고 있어서 맛으로는 구별이 된 기억이 있다. 허균은 『도문대작』에서 “나주에서는 영산강 구진포 웅어를 ‘팔도 제일’로 여기며 숭어, 뱅어, 장어, 잉어, 자라, 복어, 도랑참게와 더불어 ‘어팔진미(魚八珍味)’에 꼽았다”고 썼지만, 지금은 하구언 탓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구보는 봄철이면 김포 하성면의 전류리 포구에서 웅어회를 먹곤 한다. “이제는 간간이 잡히는 반가운 손님이 됐다”는 어부의 말을 되새기며 희소 어류의 맛을 음미한다. 전류리 어부들은 예전부터 잡은 생선들을 배에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 마포나루에 부려 팔곤 했다. 구보는 이곳에서 숭어, 황복, 장어, 참게 등 옛 한강의 맛을 건지는 즐거움을 누리긴 하지만, 점점 맛 찾기가 쉽지 않음을 느낀다. 한때는 20여 척의 어선이 있었으나 서너 척밖에 남지 않은 것은 서식 환경 파괴 탓일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웅어는 ‘떠나가버린 연인처럼 기다려도 오지 않는’ 존재가 돼버렸다. “잊힌 생선”이 돼버린 것이다. 한강 변에 둔치공원을 만들면서 갈대밭이 사라진 탓이다.

웅어는 비린내가 없고 고소해 가을 전어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봄 전어’라고 부름 직하다. 특히 석쇠 위에 얹어 굵은 소금 뿌려 구워 먹으면, 전어인지 웅어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웅어의 맛 표현 가운데는 ‘갈대 맛’이라는 시적인 표현도 있다. 갈대밭에서 부화해 치어 시절을 보내므로 갈대 내음이 몸속에 묻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다른 생선들처럼 무침으로도 먹지만, 구보는 초장이나 간장보다 콩가루에 버무려 먹어야 맛을 낸다고 느낀다. 참기름과 통깨로 버무려 먹기도 한다. 씻은 묵은지로 감싸 쌈으로 먹거나, 미지근한 밥에 얹어 회덮밥으로 비벼 먹어도 좋다.

하구언 건설과 보 설치, 강 오염 등으로 산란지를 잃으면서 웅어는 개체수가 급격히 줄었다. 존재하는데 잊은 것이 아니라 소멸하는 탓에 잊히는 운명을 맞고 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이다. 단순히 생선 하나가 잊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음식 풍경과 이야기 한 자락이 사라지는 것이다. 행호에 다시 갈대밭을 조성할 수는 없을까, 구보는 생각한다. 의지가 있다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여긴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