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시가 있는 풍경] 아무도 모르게 틈을 내밀다

입력 2024. 03. 07   14:36
업데이트 2024. 03. 07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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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희 시인
이양희 시인



아무도 모르는 
작고 여린 것들을 위해 
한 줌 흙이라도 들어앉을 틈을 내주면 
그 틈에 온몸을 걸고 
씀바귀와 꽃다지가 올라오고 있다 
한 숨을 천천히 내보내고 
다음 숨을 깊게 맞이할 틈을 벌리면 
그 틈에 온 숨을 맡기고 
봄까치꽃 제비꽃도 올라오고 있다 
날마다 조금씩 세상을 들어 올리고 있다 
틈의 끝까지 자신을 들어 올리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막막한 어느 곳 또 어느 곳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틈을 내밀어 
아무도 모르게 봄이 오고 있었다 


<시 감상> 

햇빛이 입춘과 우수의 다리를 건너오면 언 땅은 “아무도 모르게” 흙을 들어 올려 틈을 만든다. 부푼 흙과 흙 사이 작은 틈으로 봄볕이 스며들면 대지는 “아무도 모르게” 흙 속의 얼음을 녹여 조금씩 틈을 벌린다. 그렇게 풀리면서 열린 헐거운 봄의 흙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새싹이 돋아나고 “씀바귀와 꽃다지가 올라오고” “봄까치꽃 제비꽃도 올라” 온다. 시인이 바라보는 틈은 자연의 선순환 질서가 흐르고 배려의 온기와 따사로운 소통의 통로다. 그곳에 생명의 씨앗이 들어서고 새싹이 돋아나와 꽃을 피운다. 틈은 닫힌 세계가 아니라, 새 생명의 숨결이 흐르는 열린 세계다.

시인은 “한 숨을 천천히 내보내고/다음 숨을 깊게 맞이할 틈”을 내주면, 생명은 “날마다 조금씩 세상을 들어 올리고” “틈의 끝까지 자신을 들어 올린”다고 말한다. 봄 흙이 틈을 열어 생명의 꽃을 피워내듯이, 막막하게만 보이는 우리네 삶에도 “봄이 오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조용히 전해주고 있다. 선순환 자연 질서에 잠재된 보편적 진실을 성찰하고 그 의미를 전하는 소리가 잔잔한 호수를 건너오는 봄빛처럼 편안하다. 그 도드라지지 않으면서도 다감한 소리가 오히려 깊은 울림으로 들려온다. 그 울림은 넓게 퍼져서 오래 간다.

간혹 꽃샘추위가 심술을 부리기도 하지만, 틈을 내주고 기다리면 봄이 오고, 그 틈에서 부활하는 생명의 경이로움과 대면할 수 있듯이, 신춘을 맞아 소중한 사람, 소원했던 사람, 소통의 부재로 힘들어했던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틈을 보여 주자. 그 틈으로 스며드는 봄빛이 “아무도 모르게” 기적을 일으켜 희망의 꽃이 만발한 봄날 같은 세상을 선물할 듯싶다. 차용국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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