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절정이다. 태양이 작열하고 나뭇잎이 우람하고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감각기관이 자극되니 휴식이 필요하다. 이 성하의 계절에 우리를 쉬어 가게 하는 오아시스 같은 꽃나무가 있다. 바로 배롱나무다.
장미나 벚꽃처럼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하지만 늘 우리 곁에 있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녹음이 짙어질 때 우리의 시선이 지루하지 않게 어여쁜 분홍 옷을 입고 등장해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작은 나무는 단아하고 큰 나무는 흐드러진 꽃잎으로 꽃그늘까지 내어 주며 탄성을 자아낸다. 옛날에는 다양한 교훈을 주며 선비의 집 정원, 서원, 사찰, 무덤가에 심겨 있었지만 요즘은 아파트 단지나 교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배롱나무 이름은 꽃이 100일이 간다고 하여 백일홍으로 불리다가 발음이 변해 생겼다고 한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하는 꽃이다. 한 송이의 꽃이 계속 피어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송이의 꽃이 협동심을 발휘해 차례로 피고 지며 여름 내내 우리와 함께한다. 배롱나무꽃은 한 송이를 보면 소박하지만 여러 송이를 보면 풍격이 유려해 탐스럽기까지 하다. 꽃말이 부귀인 이유를 알 수 있다. 동쪽의 배롱나무꽃은 아침 여명의 빛을 더욱 찬란하게 하고, 서쪽의 배롱나무꽃은 저녁노을을 더욱 현란하게 한다.
많은 문인이 배롱나무를 주제로 작품을 남겼다. 대표적인 시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세조에게 처형되고 숙종에게 ‘충문(忠文)’의 시호를 받은 성삼문이 자신의 충절을 담아 남긴 ‘백일홍’이다. ‘어제저녁 꽃 한 송이 지고(昨夕一花衰)/오늘 아침 꽃 한 송이 피어(今朝一花開)/서로 일백일을 바라보니(相看一百日)/너와 마주하여 즐거이 한잔하리라(對爾好衡盃)’.
배롱나무에 대한 설화도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 한 바닷가 마을에서 물속 괴물(이무기)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처녀가 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졌는데, 이때 한 영웅이 나타나 자신이 처녀 대신 가서 괴물을 퇴치하겠다고 나섰다. 영웅은 처녀와 헤어지면서 자신이 성공하면 흰 깃발을 달고 돌아올 것이고, 실패하면 붉은 깃발을 달고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영웅이 괴물을 퇴치하러 떠난 지 100일이 되자 영웅을 태운 배가 돌아왔는데 붉은 깃발을 달고 있었다. 처녀는 영웅이 죽은 줄 알고 자결했다. 괴물과 싸울 때 괴물의 피가 깃발을 붉게 물들이는 바람에 영웅이 죽은 줄로 오해한 것이다. 그 뒤 처녀의 무덤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100일 동안 영웅의 무사생환을 기도하던 처녀의 안타까운 넋이 꽃이 된 것이다. 이 꽃이 100일 동안 붉게 핀다고 하여 백일홍이라 불렸다고 한다. 배롱나무에 이렇게 숭고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것을 알고 보니 꽃이 한결 사랑스럽게 보인다.
배롱나무를 만끽할 수 있는 곳 중 으뜸은 안동 병산서원이다. 병산서원을 방문하면 배롱나무가 마치 의전하듯이 양옆으로 줄지어 우리를 맞이한다. ‘자기를 낮추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이다’라는 의미의 복례문을 들어서면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연못인 광영지가 나온다. 배롱나무 꽃잎이 물 위에 떨어져 수를 놓는다면 아름다움의 극치다. 조선 최고의 건축물 만대루 주위의 배롱나무는 누각의 고색창연함을 돋보이게 한다. 입교당 뒤란에 이르면 보호수로 지정된 당당한 배롱나무들이 우리를 반긴다. 남방계 식물인 배롱나무는 추위에 약해 월동에 주의해야 했는데 온난화로 생명력이 좋아졌다 하니 이상기후의 아이러니다. 배롱나무를 찾아 길을 떠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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