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편찬연구소와 함께하는 한미동맹 70년 여정
6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주한미군 한국 주둔 규정하는
법적 원칙·기반 갖추기 위한 협정
1966년 7월 9일 체결…1967년 발효
양국 이해관계 조율하며 1·2차 개정
사회변화·안보환경 부합하도록
형사재판권·노동자 권리 보호 등
관련 절차·규정 지속 발전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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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은 1953년 체결한 상호방위조약을 시작으로 1966년 맺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등 정부와 군 당국 간의 안보 및 군사 관련 후속 협정을 통해 제도적 틀이 완성됐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SOFA는 군대를 주둔시키는 국가와 주둔군을 받아들이는 국가가 주둔으로 인해 야기되는 민·형사 문제, 출입국, 통관·관세 등을 규율하는 협정을 말한다. 이러한 SOFA 체결은 동맹국 간뿐만 아니라 평화유지활동을 위해 다른 나라에 군대를 파견할 때도 이뤄진다.
SOFA는 한미동맹의 핵심적 요소인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을 규정하는 법적 원칙과 기반을 갖추기 위해 오랜 기간 양국이 노력한 결과물이다. 군사편찬연구소와 함께하는 한미동맹 70년 여정, 오늘은 SOFA에 대해 소개한다. 임채무 기자
공고한 동맹 목적, 양국 정부 노력 담아
SOFA는 1966년 7월 9일에 처음 체결됐다. 이후 1991년 2월 1일과 2001년 1월 18일 두 번 개정됐다. 그리고 SOFA 합동위원회에서 하위 규정인 합동위 합의사항(AR) 등을 필요할 때마다 충분한 논의를 거쳐 개선했다. 여기에는 공고한 동맹을 목적으로 하는 양국 정부의 노력은 물론 한국의 주권 존중과 호혜 평등의 원칙을 요구하는 한국 일반 대중의 목소리가 큰 역할을 했다.
SOFA의 근원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12일에 체결된 ‘대전협정’까지 올라간다. 이 조약에 의하면 미국은 미국인에 관한 ‘배타적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 한국인을 구속하고 우리 정부에 인도하는 시기도 정할 수 있었다. 이는 주권침해 소지가 있는 조약이었고, SOFA 체결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는 계기가 됐다.
SOFA 체결의 필요성은 1953년 8월 8일 한미가 상호방위조약을 가조인하면서 더욱 커졌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부 장관은 공동성명서를 통해 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된 이후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협약을 “즉시 상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미국은 협상에 소극적이었고, 1960년을 넘겨서야 의미 있는 협상이 진행됐다. 미국이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주한미군에 관한 형사재판권이 가장 큰 문제였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일본, 필리핀 등과 체결한 SOFA도 마찬가지지만 미군이 범죄를 행했을 경우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SOFA와 관련된 핵심적 안건이었다. 미 국방부는 미군을 한국 법정에 세우는 것을 극히 꺼렸다. 라이먼 렘니처 당시 미 합동참모의장은 미국인을 한국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강경한 발언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미동맹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SOFA 체결의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됐다. 결국 한미 관계 악화를 우려한 양국 정부는 1962년 9월 20일에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 당시 많은 의제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논란이 된 문제는 역시 주한미군에 대한 형사재판권이었다. 미국이 고안해 낸 방안은 한국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미국이 요구하면 재판권을 인계하고, 죄질이 나쁜 경우엔 한국이 형사재판권을 행사하되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미군 피의자를 주한미군이 구속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 안(案)을 비롯해 기타 문제에 관해 절충안을 마련하면서 한미는 1966년 7월 9일 SOFA를 체결하게 됐다.
개정 통해 불평등조항 등 삭제·개선
하지만 한국의 주권 존중과 호혜 평등의 원칙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계속됐다. 우선 형사재판권과 관련해 과연 한국이 미군을 처벌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갖는 목소리가 있었다. 노동조항에 관해서는 주한미군이 ‘군사상 필요’를 명목으로 한국인 직원의 파업을 금지하며 임의로 한국인 직원을 해고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또 미국이 더 쓰지 않는 시설도 필요하면 재사용이 가능하도록 했는데, 이는 한국의 토지 개발이나 지역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러한 점을 놓고 SOFA 비준 심의 당시 일부 국회의원은 개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8년 말 2차례에 걸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SOFA 개정 요구 목소리는 높아졌다. 이에 따라 SOFA 개정 협상이 1988년 12월 16일 개시됐다. 그리고 약 2년 후인 1991년 2월 1일 첫 번째 개정이 완성됐다.
이 개정을 통해 형사재판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동시에 한국 측이 피의자 신병 인도를 요청하면 주한미군은 이를 호의적으로 고려하도록 규정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미군 피의자를 한국 교도소에 가둘 수 있게 됐다. 한국인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장치도 강화됐다. 또 미군이 반환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시설에 대한 재사용권 중지를 요구해 낭비되는 시설이 없도록 하는 등 불평등조항들이 삭제되거나 개선됐다.
합동위·분과위 등 운영해 의견 교환
SOFA는 2001년 1월 18일 다시 한번 개정됐다. 이는 SOFA 조항에 보완할 점이 확인되면서다. 당시 SOFA 규정엔 대한민국 국가안보에 관한 범죄를 미군이 저질렀을 때는 한국의 범죄자 인도 요청에 따라 주한미군이 미군 피의자를 반드시 인도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엔 한국의 신병 인도 요청에 주한미군이 ‘호의적 고려’를 한다고만 규정돼 있었다. 즉 주한미군이 미군 피의자를 반드시 넘겨줄 의무는 없었다는 얘기다.
실제 1992년 10월 28일 경기도 동두천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미군 가해자가 천안교도소에 수감됐으나 우리 법원의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가해자는 주한미군이 구속했다.
2000년 5월에는 훈련 중이던 미군 공격기가 엔진 고장으로 경기도 화성시 매향리 앞바다에 전시용 포탄을 투하해 7명이 다치고 가옥 700여 채가 피해를 봤다. 이를 계기로 앞서 언급한 형사재판권과 미군을 상대로 피해보상을 받는 민사청구권을 보완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이런 가운데 2000년 7월 14일 주한미군이 한강을 오염시킨 사실이 드러나면서 SOFA 개정 때 환경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규정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는 요구도 제기됐다. 결국 2000년 12월 말에 협상이 타결됐고, 다음 해 1월 18일 개정 협정이 조인됐다.
개정에 따라 형사재판권의 경우 주한미군 피의자를 재판이 끝난 시기가 아닌 기소된 시점부터 구속할 수 있게 됐다. 흉악범죄 등 죄질이 나쁜 경우 주한미군 피의자를 체포한 시기부터 구속할 권리도 한국으로 넘어왔다. 나아가 과거 살인 등 3개 범죄 유형에 한해 구금이 가능하던 것이 12개 유형으로 늘어났다. 환경조항도 신설돼 주한미군은 ‘자연환경 및 인간 건강의 보호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SOFA를 이행하고 한국의 관련 환경법령 및 기준을 존중하기로 했다. 반대로 한국은 주한미군의 건강 및 안전을 적절히 고려해 환경법령과 기준을 이행하기로 했다.
또 주한미군이 한국의 노동관계법령을 따르도록 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한국인 근로자를 해고할 수 없게 해 한국인 노무자들의 권익이 강화됐다. 이 밖에도 미군으로부터 교통사고 피해를 본 사람이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민사청구 절차를 신설하는 등 많은 부분이 보완됐다.
SOFA는 현재진행형이다. 한미는 개선이 필요한 사항이 생기면 SOFA 합동위원회를 개최하고 충분한 논의를 거쳐 SOFA의 하위 규정인 합동위 합의사항 등을 조정하고 있다. 또 분과위원회와 산하 실무그룹도 운영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한다. 결국 SOFA는 지난 세월 한미동맹을 성숙하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사회 변화와 안보환경에 부합하도록 관련 절차와 규정을 발전시킴으로써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는 또 다른 축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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