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아름다운 연둣빛 여행지
봄은 연두다. 분홍색 벚꽃잎 흩날리던 시간이 하룻밤 꿈이었다면, 연둣빛 신록으로 산천이 물드는 계절을 진짜 봄이라 할 수 있다. 화려하게 피었다가 금세 후두두 떨어지는 목련과 복사꽃을 보며 허무를 느꼈다면, 나날이 커가고 색이 짙어지는 잎사귀를 보며 성장과 성숙을 배운다. 그러니까 연둣빛 봄은 가능성의 계절이고, 희망의 계절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연둣빛 봄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를 소개한다.
한낱 곡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트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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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청보리밭=이맘때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진귀한 풍광으로 보리밭을 꼽을 수 있다. 한낱 곡물에 지나지 않는 보리가 뭐가 대단하냐고? 제주도 가파도나 전북 고창을 가보면 알게 된다. 연둣빛 청보리가 바람에 넘실대는 모습이 파도치는 것 같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트이고 보리밭 속을 걸으면 마음까지 연둣빛으로 물드는 것 같다. 가파도는 절정이 지나 보리가 누렇게 익기 시작했다. 전북 고창은 지금이 절정이다. 다음 달 7일까지 ‘고창 청보리밭축제’도 열린다.
축제를 여는 고창 학원농장 보리밭 면적은 33만㎥에 달한다. 축구장 50개 크기다. 늦가을에 파종한 보리가 4월 중순이면 연둣빛을 띠고, 샛노랑으로 만개한 유채꽃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풍경을 보기 위해 봄 마다 수십만 명이 고창을 찾는다.
학원농장에서 가장 붐비는 곳은 유채와 보리가 어우러진 입구 쪽 밭이다. 여기가 전부는 아니다. 차 없는 거리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한적하고 드넓은 보리밭이 또 나온다. 찬찬히 산책을 즐기거나 트랙터 관람차를 타고 둘러봐도 된다.
다른 지역에서도 청보리축제를 열지만 고창을 따라갈 만한 곳은 찾기 어렵다. 완만한 구릉과 주변 산세가 어우러진 풍광이 수채화 같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비롯한 무수한 작품을 이곳에서 촬영한 이유다.
고창에서 연둣빛 봄을 만끽할 곳은 청보리밭 말고도 많다. 선운사나 고창읍성이 대표적이다. 2021년 유엔이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로 선정한 고인돌마을·운곡습지도 들러보길 권한다.
운곡습지는 먼 옛날부터 벼농사 짓던 동네다. 1982년 한빛원전의 냉각수 용도로 댐을 만들면서 마을 주민이 전부 이주했다. 이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참 방치됐던 논이 스스로 원시 습지 상태로 되살아났다. 운곡습지는 국내서 보기 드문 산지형 저층습지다. 해발 100~200m 사이에 정글 같은 습지가 분포해 있어 가볍게 트래킹을 즐기며 둘러보기 좋다. 습지 오르는 길에 선사시대 고인돌도 볼 수 있다.
봄비 촉촉이 내리는 날이면
쑥쑥 자라는 죽순과 눈 맞추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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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녹차밭=전남 담양은 죽향(竹鄕), 즉 대나무의 고장이다. 담양에서는 산림욕이 아니라 죽림욕(竹林浴)을 즐긴다. 가장 인기 있는 대숲은 한 해 100만 명 이상이 찾는 국가대표 관광지 ‘죽녹원’이다. 기존에 있던 대숲을 담양군이 정비해 2003년 개장했는데 인기가 여전하다. 2018~2022년 누적 기준, 광주·전남에서 내비게이션 검색 1위를 차지했다.
죽녹원 면적은 31만㎡에 달한다. 봄비 촉촉이 내리는 지금은 ‘대나무 새끼’인 죽순도 많이 보인다. 하루에 1m씩도 자란다는데 숲 곳곳에 꺼뭇꺼뭇한 죽순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 ‘우후죽순(雨後竹筍)’이란 말이 실감난다. 산책로 8개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고 경사가 심하지 않아 연세 지긋한 어른도 걷기 좋다.
조금 한가한 장소를 찾는다면 대나무골테마공원도 좋다. 잘 정돈된 죽녹원에 비하면 숲다운 자연미를 느끼기 좋다. 담양에는 354개 마을 가운데 350개 마을에 대숲이 있다. 과연 죽향이라 할 만하다. 대전면 행성리, 담양읍 삼다리에 있는 대숲이 산책하기에 좋다. 관광객 많은 공원에 비하면 호젓하다.
담양에는 유서 깊은 원림(園林)도 많다. 원림은 집에 딸린 숲을 일컫는데 마당, 정원과는 또 다르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정원이 인위적인 조경 작업을 통해 동산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동산과 숲의 자연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쇄원이 담양을 대표하는 원림이다. 불규칙하게 배치한 건물과 정자, 기우뚱한 돌담, 이리저리 꺾이며 흐르는 계곡물에서 자연미의 극치가 느껴진다. 식영정, 면앙정, 송강정 등 조선 시대 문인들이 사랑한 정자에도 담양 원림의 품격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새순으로 반짝이는 진풍경에 놀라고
한 해 중 가장 맛있는 차 맛에 빠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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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대나무=한국인은 한 해 평균 367잔의 커피를 마신다. 전 세계에서 프랑스(551잔) 다음으로 커피 소비량이 많다. 프랑스 사람도 한국인을 보면 놀랄 테다. 얼어 죽을 것 같은 겨울에도 ‘아아(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민족이니까. 최근에는 변화의 조짐도 보인다. 차가 뜨고 있다. 젊은층을 대상으로 한 차 전문 카페도 많이 생겼고, 차 특유의 깊은 맛을 즐기는 마니아도 늘어나는 분위기다.
한국 차의 본고장은 전남 보성군이다. 국내에서 녹차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지역으로, 지금 보성을 가면 연둣빛 새순으로 반짝이는 진풍경도 보고 한 해 중 가장 맛있는 차도 마실 수 있다. 지난 20일은 음력 절기로 ‘곡우(穀雨)’였다. 봄비가 내려 곡물을 기름지게 한다는 뜻이다. 곡우 전에 수확한 찻잎을 우려낸 ‘우전차(雨前茶)’는 맛과 향이 싱그럽고 그윽하며 생산량이 극히 적어 가장 고급차로 대우받는다.
보성에서는 전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차밭 풍광도 볼 수 있다. 녹차를 안 좋아해도 보성까지 가볼 만한 이유다. 산비탈에 허리춤까지 자란 차나무가 유려한 곡선을 이룬 모습이 기막히다.
보성에는 차를 재배하는 ‘다원(茶園)’과 차 가공업체가 무려 64개나 된다. 1939년 개장한 ‘대한다원’이 대표적이다. 580만 그루가 넘는 차나무가 있는데 이게 다가 아니다. 남부지방에만 사는 삼나무가 줄지어 선 산책로도 멋지다. 어린 찻잎이 돋아난 차나무 물결부터 이끼가 덮여 있는 삼나무 숲까지, 온통 초록 세상이다.
오는 29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보성다향대축제’가 열린다. 한국차문화공원, 대한다원 등지에서 공연도 보고 다양한 체험도 즐길 수 있다. 녹차 찻잎 따기, 차 만들기뿐 아니라 족욕, 캠핑 체험도 가능하다.
보성의 이웃도시 순천시에서는 오는 10월 31일까지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진행된다. 다향대축제 기간에 보성군에서 셔틀버스를 운영하니 먼 남도까지 간다면 박람회를 함께 즐겨도 좋겠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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