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인간
“나는 인간이다. 나는 죽음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한다.” - 에곤 실레의 삶과 예술
당대 최고 미술학교 권위에 맞서다 퇴학
새 스승 클림트 만나 활발한 작품 활동
거칠고 뒤틀린 누드화와 숱한 자화상
퇴폐 논란 딛고 빈 미술계서 높은 명성
1차 대전 징집 후 가족 주제 그림 몰두
스페인 독감에 아내도 잃고 28세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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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그림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풍경화와 초상화, 모두 아름다움(美)을 추구했고, 유럽 사회에서 미술의 고정관념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 그런데 ‘벨라 에포크(1871~1913)’ 말기 한 청년 작가가 당대의 보수적인 미의식에 반기를 들었다. 그 작가는 바로 에곤 실레(1890~1918)였다.
실레는 벌거벗은 육체, 퀭한 눈동자, 비틀린 구도의 자화상을 집요하게 그렸다. 세상은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풍기문란의 죄목을 덧씌웠지만, 기묘한 그의 그림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렸다. 실레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죽음과 몰락의 정서가 가득한 실레의 그림은 그가 살아간 시대를 닮았다. 긴 번영 끝에 발발한,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잔인한 전쟁(제1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미의식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미국 작가 로렌스 샌더스는 실레의 그림을 보며 이렇게 자문자답했다.
“의문은 있으나 대답은 없다. 문제는 있으나 해결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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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는 1890년 오스트리아 수도 빈 인근의 툴른에서 출생했다. 실레는 셋째이자 외아들이었다. 실레의 집은 극도로 가난했다. 철도역장으로 근무하던 아버지 아돌프 실레는 매독성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치료를 거부하는 바람에 어머니 마리 실레 역시 감염되어 세 아이를 사산했고, 장녀 엘비라는 10세에 사망했다.
아버지로 인한 암울한 분위기, 병약한 여자 형제들에 둘러싸인 가정환경은 실레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실레는 어린 시절부터 혼자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서 실레는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1906년, 실레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빈 미술 아카데미에 진학했다. 당대 유럽 미술을 대표하는 빈 미술 아카데미는 화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최적의 발판이었다. 그러나 실레는 곧 빈 미술 아카데미의 권위적인 교수들에게 실망했다.
특히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이라는 노교수는 실레의 그림을 보고 “사탄의 자식”이라고 호통을 쳤다. 그리펜케를 교수에게 찍히면 졸업까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09년, 실레를 중심으로 뭉친 학생들이 크리펜케를 교수의 수업을 거부하고 13개 항목에 이르는 아카데미 개혁 요구안을 학교에 제출했다. 학교는 개혁안을 거부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실레는 퇴학을 당했다.
학교를 떠난 실레는 새로운 스승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를 만났다. 당시 파리에서는 보수적인 화풍에 반발한 아르누보 화풍이 새롭게 유행했고, 그 열기는 뮌헨과 베를린으로 번졌다. 빈에는 클림트를 중심으로 ‘빈 분리파’라는 그룹이 결성되었다.
클림트의 그림을 본 에곤 실레는 커다란 자극을 받았고, 두 사람은 곧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학교를 떠난 해에 실레는 클림트의 도움으로 빈에서 열린 ‘국제 미술전’에 작품 4점을 출품했다. 같은 해 동료들과 결성한 ‘새로운 예술가 그룹’의 전시회도 열렸다. 2년 후 실레는 마침내 첫 개인전(1911)을 열었다. 이 시기에 실레는 클림트의 모델이자 제자인 ‘발리 노이칠’이라는 여성과 만나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다. 실레는 누이동생과 발리를 모델로 삼아 거침없이 다양한 누드화를 그렸다. 실레가 그린 거칠고 뒤틀린 터치의 누드화를 본 사람들은 조용히 열광했다. 그의 누드화는 당시 부르주아 계층의 타락과 위선, 이중성을 우회적으로 고발하는 역할을 했다.
온갖 악소문에 휘말린 실레는 미성년자를 유괴하여 그림을 그린다는 의혹을 받고 경찰에 연행되었다. 1912년 일어난 ‘노이렌바흐 사건’이다. 미성년자 유괴라는 누명은 벗었지만, 압수한 누드화를 본 경찰은 실레를 풍기문란 죄목으로 구류 처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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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에 갇힌 3주간 실레는 자기 작업의 의미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인간의 육체는 마냥 아름답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상’이라는 기준을 설정하여 미(美)와 추(醜)를 구분하고, 교육으로 세뇌하면서 서로를 기만한다. 소멸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는 나약한 육체야말로 인간의 본모습이다. 한 자화상 말미에 실레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죽음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한다.”
실레는 자기 자신을 모델로 계속 자화상을 그렸다. 실레의 그림은 빈 미술계에서 확고하게 인정받았고, 그의 명성도 높아졌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지만, 실레는 허약 체질 판정을 받아 병역을 면제받았다. 다음 해 실레는 돌연 결혼을 결심했다. 그는 부르주아의 보수성과 이중성을 그토록 싫어하면서도 결혼만은 교양 있는 부르주아 여성과 해야겠다는 생각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실레는 철도청 공무원의 딸 에디트 하름스에게 청혼하면서 자신과 4년 동안 동거했던 발리에게 일방적으로 결별을 선언했다. 실의에 빠진 발리는 적십자 종군 간호사로 지원하여 전선으로 떠났다.
전황이 악화하자 실레에게도 징집 영장이 날아왔다. 1915년 5월 31일, 결혼을 불과 2주 앞둔 시점이었다. 결혼식 4일 후 실레는 프라하의 훈련소로 떠났다. 갓 결혼한 아내 에디트는 남편을 따라 프라하의 호텔에 방을 잡았다. 두 사람은 병영의 담 너머로 겨우 몇 마디씩 대화할 수 있었다. 실레의 명성을 접한 지휘관은 그를 러시아군 포로수용소에 배치했다. 덕분에 실레는 복무 중에도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1917년, 발칸 반도 달마티아 전선에서 발리가 성홍열에 걸려 사망한 것이 전조였다. 이듬해 1918년 1월에는 스승이자 선배, 친구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클림트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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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마지막 해인 1918년에 실레는 아내의 초상화와 ‘가족’을 소재로 한 그림을 여러 장 그렸다. 1918년 3월에 열린 빈 분리파 정기 전시회에서는 19점의 회화와 29점의 수채 드로잉이 모두 팔려 나갔다. 실레는 전쟁이 끝나면 가정을 꾸릴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전쟁 말기 스페인 독감이 유럽을 강타했다. 1918년 10월 28일, 임신 6개월이었던 아내 에디트가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했다. 실레 역시 스페인 독감에 걸렸다. 그는 죽기 직전 매제인 안톤 페슈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앞에 큰 무언가가 있는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 종전을 목전에 두고, 3일 만에 실레와 아내, 태아는 모두 사망했다.
28년의 짧은 생애에 실레는 300여 점의 유화와 2000점이 넘는 데생을 남겼다. 실레는 나치 정권 시기에 ‘퇴폐 작가’로 분류되어 미술사에서 지워졌으나 1970년대부터 다시 복원되기 시작했다. 불안한 시대, 가치관과 정체성의 혼란, 고독, 욕망, 모순이 뒤섞인 실레의 그림은 현재에 더 큰 울림을 준다. 오늘날 무수히 ‘셀카’를 찍어대는 우리의 모습은 자화상으로 일기를 대신했던 에곤 실레의 불안과 혼동, 나르시시즘을 떠오르게 한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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