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는 언제나 평화 유지에 진심이었다
정전협정 후 한국군 전력증강 지원
미군, 전선 최전방지역 방위 임무
전쟁 시 자동개입 '인계철선' 역할
북 도발 억제·연합전력 기능 수행
베트남전, 한미 군사관계 새로운 전기
군사원조 지속·국군 현대화 추진 동력
1971년 확대 개최 한미안보협의회의
수평적 동맹관계 발전 전환점 평가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은 한국에 주둔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동맹의 상징인 ‘주한미군’이다. 주한미군은 정전협정 후 우리 군의 전력증강과 교육훈련을 지원해 국군 현대화·정예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지난 70여 년간 우리 국군과 함께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며 한반도 평화를 수호했다. 지금도 우리의 가장 강력한 전우로 우리와 어깨를 마주하며 평화를 지켜 내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및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에 따라 주한미군의 규모에도 변화가 있었다. 오늘은 정전협정부터 1970년대까지의 주한미군과 국군의 변천사를 정리했다. 임채무 기자/사진=한국정책방송원 e영상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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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세, 군사전략에 따라 규모 변화
한미상호방위조약 제4조에는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비(配備)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許與)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은 주한미군이 대한민국 영토 내에 합법적으로 주둔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미국은 6·25전쟁이 끝나자 한반도에 육군 7개 사단, 해병대 1개 사단 등 32여만 명의 주한미군을 주둔시켰다. 이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의 ‘뉴룩(New Look) 정책’과 ‘대량보복전략’에 따라 2개 사단(7만여 명)만 남고 단계적으로 철수했다.
1954년 3월 14일부터 미 제45·40사단, 해병대 제1사단이 한반도에서 떠났다. 미 제45사단은 이 과정에서 주요 전투장비를 국군에 인계했다. 이어 1954년 8월 18일부터 미 제3·25·24사단이 철수했고, 제5공군사령부는 오산에서 일본의 나고야로 이동했다. 일부 독립 비행연대들도 규슈와 사세보로 재배치됐다.
미국 내에서는 정전협정 이후 주한미군의 주둔 규모를 상징적으로 1개 여단 정도 남겨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①정전협정 체결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군사위협이 지속돼 이를 억제해야 한다는 점 ②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 시 공산세력의 오판에 의해 전쟁이 발발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 ③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할 경우 유엔군이 패퇴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어 1954년 제네바 정치협상 등에서 협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 ④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유지함으로써 한국 단독의 북진통일 위험성을 억제한다는 의도 등을 고려해 2개 사단 규모가 잔류하게 됐다. 이 규모는 1969년 ‘닉슨독트린’이 발표될 때까지 지속된다.
미 국방부는 1954년 11월 20일 태평양 방면에서 미국의 전략적 지위를 개선하기 위한 미군 재배치 계획의 하나로 미8군사령부를 일본 자마 캠프로 이전했다가 1955년 7월 26일 서울로 다시 복귀함으로써 ‘용산시대’를 열었다. 이어 1957년 7월 미 국방부는 주일미군의 하와이 이동에 따라 서울에 있던 미 극동지상군사령부를 해체하고, 유엔군사령부를 도쿄에서 서울로 이전하는 동시에 주한미군사령부를 창설했다. 주한미군사는 한반도에 잔류해 있던 미 제8군과 제314비행사단 등 7만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됐다. 주한미군사는 휴전선 일부 지역을 직접 방어하며 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는 억지전력의 역할과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맡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이어 1954년 체결된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지원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합의의사록(한미합의의사록)’ 제2조에서 한미 양국은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과 관련해 ‘유엔사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책임지는 한 그 군대를 유엔사의 작전통제권하에 둔다’고 규정했다. 이렇게 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전후에도 계속 유엔군사령관에게 있다고 규정한 것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 요구를 억제하려는 미국의 안전조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의사록에는 국군의 최종적인 규모와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 등도 규정됐다. 미국 정부는 한국이 육군 66만1000명, 해군 1만5000명, 해병대 2만7500명, 공군 1만6500명 등 모두 72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육성할 수 있도록 군사원조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60년대까지 미국은 매년 3억 달러에 이르는 군사원조를 제공했는데, 이는 한국 국방비의 87%에 달하는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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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부대 개편 통해 군수지원태세 갖춰
국군은 6·25전쟁 이후 미국의 군사원조를 토대로 군을 재정비하고 기구를 개편해 1953년 12월 육군제1군사령부, 1954년 10월 제3군사령부를 창설하고 각각 그 예하에 군수지원 기능을 부여했다. 또 10개 예비사단을 창설하며 군비를 증강했다.
한편 6·25전쟁 초기 서울을 떠났던 각 군 본부는 1955년 초 서울로 돌아왔다. 국군이 부대 개편을 통해 스스로 군수지원태세를 갖추게 되자 1956년도부터 미 합동참모본부는 ‘군사지원계획(MAP·Military Assistance Program)’에 따라 직접 군사원조에서 정상 군사원조로 전환해 연평균 2억85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미국의 군사지원은 1958년도를 정점으로 점차 감소해 1959년도부터는 유지비에 속하는 물자 중에서 국내 생산이 가능하거나 통상적인 국제무역으로 획득이 가능한 물자는 한국 측에 이관하는 계획이 시행됐다. 이에 따라 1959년 당시 한국의 국방비는 국민총생산(GNP)의 7.5%, 정부 일반예산의 45% 비중을 차지하게 됐고 국가 재정상 부담으로 작용했다. 결국 한미 양국은 6·25전쟁 이후 계속적인 국군의 부대 증편과 군비증강이 두 나라의 국가 재정에 부담을 초래하게 됨에 따라 1958년도에 국군의 병력 규모를 72만 명에서 62만 명으로 감축하는 ‘한국군 감군계획’에 합의했다. 이때 우리 국방부는 국군의 군구조 개편과 부대 해체를 병행해 전력을 증강하는 방식으로 감군정책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국군과 주한미군의 역할에도 변화가 생겼다.
주한미군은 미 제1군단으로 하여금 미 제2·7사단, 국군 제1·5·6군단을 작전 통제해 서울과 인접한 서부전선 방어를, 국군은 동부전선과 후방지역을 담당하게 됐다. 1957년 6월 21일 유엔군 측이 북한의 불법 전력증강에 대한 단호한 대처로 정전협정 제13조 D항(신무기 도입 금지)의 폐기를 선언함으로써 미 보병사단과 편제부대들은 새로운 편제로 개편했다. 5각 편제를 적용한 신편 사단인 ‘펜토믹 사단’은 전술 핵무기 투발수단을 구비해 화력 면에서 획기적인 증강을 이뤘고, 기동력과 통신 능력도 개선했다.
특히 미군은 1958년 주한미군의 무기 근대화에 관한 성명을 발표한 후 메타도어(Metador) 중거리 유도탄, 280㎜ M-65 자주포, 어네스트존(Honest John) 유도탄, H-21 플라잉 바나나 수송헬기 등을 배치했다. 또 M-46 전차를 M-47 전차로 대체하고, M-14 자동소총을 지급했다. 이 밖에 제4유도탄기지사령부, 제38방공군사령부와 함께 전쟁 재발상황을 가정해 1954년부터 포커스렌즈(Focus Lens) 지휘소연습과 1961년부터 독수리(Foal Eagle) 훈련을 시작했다.
미국의 군사원조는 1960년에도 지속됐다. 한미 군사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베트남전쟁이었다. 미국은 국군의 베트남전쟁 파병을 대가로 1966년 3월 4일 ‘브라운 각서’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한국에 주한미군의 주둔과 군사원조 지속, 한국군 현대화 계획 추진 등을 약속했다. 이를 통해 국군은 1960년대 말까지 3개 예비사단을 전투사단화하는 동시에 육군 1개 사단과 호크·나이키유도탄·어네스트존 대대를 창설하고, M-48 전차를 도입할 수 있었다.
해군은 3개 전단, 해병대는 1개 여단을 추가하고 대간첩작전용 고속정 건조와 구축함·호위함을 전력화했다. 공군은 1개 전투비행전단과 작전사령부·군수사령부를 각각 창설하고, F-5A·F-4D 전투기를 도입함으로써 열세에 놓여 있던 항공전력을 보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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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주둔 자체로 북한에 심리적 부담 줘
1960년대 들어 북한의 빈번한 군사도발은 한미 군사관계를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1968년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후 한미 양국은 한미 국방각료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이 회담으로 미국은 한국에 M16 소총을 생산할 수 있는 군수공장 설치와 대간첩기구 편성, 향토예비군 무장지원 및 1억 달러의 추가 군사원조를 약속했다. 또 주한미군사 내 ‘한미연합기획참모단’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회담은 1971년 제4차 회의 때부터 한미안보협의회의(SCM)로 확대돼 올해 제55차 회의를 앞두고 있다.
회담은 1953년 한미동맹이 체결된 후 미국 주도적인 동맹관계에서 벗어나 점차 수평적 동맹관계로 발전하는 역사적인 전환점이 됐다. 무엇보다 한미연합기획참모단 설치는 정전협정 후 처음으로 한국 방위계획 수립에 우리의 의사를 반영하는 기회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미국의 대한(對韓) 방위정책은 1969년 닉슨독트린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맞았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아시아의 모든 국가와 조약상 약속을 지키겠지만 강대국의 핵 위협을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해 각국이 스스로 협력해 그에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우리 정부는 주한미군 철수를 심각한 안보위기로 인식하고 미국의 철군방침을 철회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주한미군의 철수계획은 기정사실화돼 주한미군 철군에 대비한 정부 당국자 간 회담을 연쇄적으로 개최했다. 한미 양국 간에도 주한미군 일부 병력의 철수로 인한 전력공백 발생을 방지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미국의 방위공약 이행 보장, 한국군 전력증강 및 현대화를 위한 미국의 지원 협의를 시작했다. 다음 편에 후술하겠지만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 정부는 의회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권고에 따라 1971년 6월까지 아시아에서 총 42만 명의 미군을 철수하기로 하고, 그중 2만 명의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동시에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5개년 계획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군은 이를 계기로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며 현대화 계획(율곡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종합해 보면 주한미군은 6·25전쟁 이후 군사원조를 통해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와 재건, 국군의 전력증강을 지원했다. 또 전선 최전방지역 방위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역할과 한반도 전쟁 발발 때 연합전력으로서 기능, 정전협정 유지 기능을 이행했다. 특히 전쟁 발발 때 서부전선에서 북한의 주공격로 중 하나인 개성~판문점~문산~서울로 이어지는 축선에 배치돼 미군이 자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인계철선(tripwire) 역할을 했다.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북한에 심리적 부담감을 줬고, 한반도에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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