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교양 파란만장 커피사

아무리 추워봐라, 따뜻한 커피 먹나…‘얼죽아’ 사랑 이유 있었네

입력 2023. 02. 14   16:04
업데이트 2023. 02. 17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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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커피사 -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열광하는 이유

 

영하 20도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아족’ 
SNS서 놀이처럼 시작해 현상으로 굳어져
차가움에 마시는 즉시 깨어나는 듯한 자극
업무 강도 높은 현대인, 만족감 크게 느껴
실제 판매 증가…음료 문화의 진화 해석도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기는 한국인의 냉커피 사랑이 세계 커피문화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K팝을 이끄는 연예인들과 K드라마 속에서 인기 배우들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장면이 자주 노출되면서, 이 음료의 명칭을 ‘코레아노(Koreano)’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세계적 통신사인 AFP가 지난 10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는 ‘한국인의 차가운 커피 사랑’이 너무나 뜨겁다(Coffee so cold it’s hot: South Korea’s love of iced Americano)”는 익살스러운 제목의 특집기사를 지구촌 전역에 타전했다. AFP는 특히 “‘비록 추워서 죽는다 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말이 한국의 새로운 격언이 됐다”면서 ‘얼죽아 현상’을 소개했다.

국내에서는 2018년 12월 추운 어느 겨울 날, 트위터를 통해 “얼어 죽어도 아이스 커피(얼죽아)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밝힌 ‘얼죽아 협회’의 글을 계기로 퍼져 나간 현상들이 4년여 만에 외신을 타고 세계인의 주목을 끈 것이다. 2018년에는 수은주가 영하 20도까지 떨어지는 강추위가 닥쳤는데, 그 와중에 얼죽아 협회가 “근래 없던 추위로 인해 회원들이 변절의 길을 걷고 있다는 비보를 들었다. 삼가 소신을 유지하자”는 내용의 글을 띄워 웃음을 선사했다.

그런데 이것이 ‘찰나의 유머’로 끝나지 않았다. ‘쪄 죽어도 뜨거운 커피’를 지향하는 ‘쪄죽뜨 협회’가 결성돼 ‘얼죽아’를 풍자하는 글이 이어지고, 각각 취향에 맞는 사람들이 지지하는 글을 퍼나르기 하는 가상게임으로 번졌다. 이 시기보다 조금 앞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자주 마시는 사람들을 ‘아아족’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이에 맞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따아족’을 결성해 양측 간에 전선이 형성되던 터였다.

소비자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마침내 커피전문점의 매출 양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디야커피는 2018년 겨울시즌 3개월간 아이스 아메리카노 판매량이 전년보다 37%(158만여 잔), 투썸플레이스는 28% 늘어났다.

스타벅스도 한파가 절정인 2019년 1월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매출이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40%나 치솟기 시작해 2022년에는 이용객 10명 중 7명 이상이 아이스 음료를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겨울인 지난달에는 급기야 아메리카노 판매량만 따질 때 ‘아아’가 ‘따아’를 제쳐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판매 비중이 54%를 차지했다. 한파에도 불구하고 절반 이상이 아이스 음료를 구매한 것이다.

한국인의 얼죽아 현상에 대해 소위 ‘빨리빨리 문화’로 해석하기도 하고, 노동 강도가 강해 짧은 시간에 꿀꺽 마셔버려야 하는 일터의 풍토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냉면을 좋아하는 식성에서 그 뿌리를 찾으려고도 한다.

평양냉면은 본래 한겨울에 즐기는 것으로 ‘이한치한’을 상징한다. 『동의보감』에는 냉면의 주재료인 메밀과 무의 성질이 차갑지만, 위장을 튼튼하게 해준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차게 즐기는 이유가 건강보다는 맛 때문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우리네 전통 메밀은 여름보다는 가을에 수확했고, 면으로 만들면 푸석해서 뜨거운 물에 넣으면 쉽게 풀어졌기 때문에 동치미 등 차가운 국물에 넣어야 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인기도 맛으로 풀이할 수 있다. 뜨거운 커피에 비해 한 모금 가득 입에 담을 수 있어 ‘양적 포만감’이 뛰어나다. 덕분에 입안의 점막을 눌러주는 강도가 상대적으로 강해 보디감이 뜨거운 커피보다 되레 묵직하고, 그로 인한 만족감이 크다. 차가움으로 인한 첫인상이 강렬하고 상쾌해 기분 전환에도 더욱 효과적이다.

하나 더 있다. 카페인의 각성 효과는 마신 뒤 20~30분이 지나야 서서히 나타나는데, 이 공백 기간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청량감으로 메워준다. 마시는 즉시 깨어나는 듯한 물리적 자극을 준다는 점도 ‘따아’가 ‘아아’를 이겨내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차가운 커피 음료를 선호하는 현상은 한국뿐 아니라 유럽을 제외하고 미국과 일본, 중국에서도 몇 해 전부터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영국의 시장조사 전문기관인 민텔(Mintel)에 따르면 2017년 전 세계에서 출시된 커피 신제품 5개 중 1개가 아이스 음료로, 전년보다 16% 증가했다.

미국은 냉커피 제품의 출시가 2013년~2017년 사이에 매년 최소 10%씩 성장했다. 2017년 미국에서 새로 출시된 커피 음료의 56%가 냉커피로 전년보다 38%나 증가했다. 한국에서 얼죽아 현상이 내부적으로 활발하게 퍼져 나가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도 아이스 커피의 출시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고 민텔은 소개했다. 일본도 2017년 전 세계에서 출시된 RTD(Ready to Drink) 아이스 커피의 18%를 차지하며 아이스 커피로의 혁신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차가운 커피 선호 현상’을 한때의 유행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음료 문화의 진화로 보는 견해가 있다. 스타벅스의 하워즈 슐츠 회장은 지난해 9월 영국 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미래지향적 쇄신을 천명하며 북미 시장에서만 약 5700억 원을 투자할 계획을 발표했는데, 그 중심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은 냉커피 전용 머신을 개발해 배치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아이스 커피의 기원은 잘 기록돼 있지 않지만, 중동이나 아시아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커피를 뜨거운 형태로 소비했지만, 냉장 기술이 발전하면서 커피를 상쾌하게 즐기기 위해 얼음을 넣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아이스 커피는 20세기 초 특히 북동부와 남동부 지역에서 일반화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여름이 덥고 습하기 때문에 뜨거운 커피를 즐기기 어려웠고, 이때 간편하게 얼음을 만들어 주는 냉장고의 보급은 아이스 커피를 가정에까지 퍼트리는 동력이 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만큼이나 차가운 음료를 세계에 퍼트린 메뉴는 얼음을 갈아 넣어 만든 프라푸치노였다. 프라푸치노는 미국 보스턴에 있던 카페 ‘커피 커넥션(Coffee Connection)’의 주인인 조지 하웰(George Howell)이 개발한 것인데, 1994년 스타벅스가 거액을 주고 사들여 전 세계에 퍼트렸다. 얼음을 씹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갈아 넣어 차가움을 더욱 빠르면서도 강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한 이 음료의 아이디어는 슬러시(Slush)에서 왔다.

슬러시는 우연한 사고로 발명됐다. 1950년대 미국 캔자스시티에 사는 오마르 크네들릭(Omar Knedlik)이 탄산음료를 차게 마시려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깜빡 잊어버리는 바람에 살얼음이 낀 음료를 마신 것에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차가움이 주는 관능적 인상을 추구하는 것은 현대인의 본능이라는 주장도 있다. 인체 활동은 체온을 높이고, 일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통제의 범위를 넘게 되는데 이를 빨리 식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안정감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얼음은 매우 요긴하다. 냉동 기술이 보편화하지 않았을 땐 열을 식히기 위해 휴식이 필요했지만, 얼음을 쉽게 조달할 수 있게 되면서 아이스 커피의 보편화는 운명적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갈수록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열광하는 현상이 휴식을 더욱 요구하는 고단한 우리들의 일상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필자 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은 충북대 미생물학과, 고려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 영어영문과 언어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커피인문학』 등을 저술했다.
필자 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은 충북대 미생물학과, 고려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 영어영문과 언어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커피인문학』 등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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