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조명탄_오설자 작가] 우산

입력 2023. 02. 08   16:05
업데이트 2023. 02. 08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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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설자 작가
오설자 작가


비 오는 날, 아이들을 교문까지 데려다줍니다. 교문에는 할머니 엄마 아빠들이 알록달록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 있습니다. 내 손을 잡고 가던 아이들은 이내 손을 풀고 팔랑이는 나비처럼 달려가 부모들의 우산 속으로 뛰어듭니다. 기다리는 품 안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봅니다. 어린이들과 함께 할 때 기억나는 아름다운 한 장면입니다.

청수사에 다녀온 아들이 우산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비를 맞으면 우산에 꽃이 핀다는 말에 어서 비가 오길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산책을 나섰습니다. 후드득 빗방울이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가 경쾌했습니다. 이윽고 빗방울 사이로 엷은 꽃잎 무늬들이 여기저기 돋아났습니다.

친구와 문경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고택에서 하룻밤을 묵고 올 예정이었지요. 차 없이 간 터라 동네 밖에서부터 걸어서 도착한 한옥마을에는 편의점 하나 없었습니다. 숙소 근처에서 먹을 것을 사려던 우리는 좀 당황했습니다. 주전부리도 없어 난감했는데 이모님 같은 주인어르신이 주신 라면에 푹 익은 파김치를 얹어 어찌나 달게 먹었는지요. 연로하신 두 분이 그 너른 건물을 관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을 텐데 곳곳에 핀 모란이며 반짝이는 마루며 무척 정갈했습니다. 다음날 새벽안개가 감싼 연못에 소나무가 멋들어진 후원을 거닐었습니다. 잊지 못할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고마워하며 일찍 나섰지요.

언제나 물건을 놓고 오는 나는 그날도 여지없이 흘리고 왔습니다. 방 밖 기둥 옆에 얌전히 우산을 세워 두고 온 것입니다. 잃어버린 장갑, 우산, 손수건…. 그런 걸 모으면 아마 장사를 해도 될 것입니다. 서울로 오는 내내 아끼던 우산 생각에 서운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속절없이 창밖을 보며 두고 온 우산 생각이 더 간절해졌지요. 터미널에 도착하자 빗줄기는 더 굵어졌습니다.

“우산들은 가지고 오셨어요?”

느긋한 경상도 억양의 기사님이 버스 선반 문을 열고 우산들을 꺼냈습니다. 긴 우산, 일회용 우산, 접이 우산. 손님들이 놓고 간 것들이었죠. 나처럼 물건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은가 봅니다. 접이식 고급우산을 받은 나는 어떻게 돌려주어야 하냐고 했더니 기사님이 넉살 좋게 대답했습니다.

“그냥 안 주셔도 됩니다. 이래 다 인연인 거죠. 필요하신 분 쓰시고 비 안 맞으면 고마 좋은 거 아입니꺼.”

걱정하던 손님들은 뜻밖의 친절에 모두 따뜻해진 얼굴로 내렸습니다. 나도 우산을 폈습니다. 비 내리는 하늘에 기사님의 웃음처럼 활짝 펴졌습니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는 선행나누기를 실천하는 한 중학생이 나옵니다. ‘Pay It Forward’,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행동입니다. 한 사람이 세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고 그들은 각각 또 다른 세 사람에게 친절을 전해준다면 수많은 사람이 사랑을 베풀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도움 릴레이 운동입니다.

누군가에게 우산이 되어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요? 그날 우산을 받은 사람들은 영화에서처럼 또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나눌 것이 분명합니다. 친절은 그처럼 돌고 돕니다. 선행은 또 다른 선행을 불러옵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타인을 위해 따뜻한 마음을 행동으로 나눈다면 스스로를 바꾸고, 이웃을 바꾸고,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작지만 선한 행동 하나에 희망을 봅니다.

꽃 한 송이로 봄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봄이 오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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