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지열
동네 사람 1000명 돌아가며 바느질한 행운 주머니 두르고 입대
마지막까지 점령지 지켜야 했던 헌병들 실종·행불 많아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30 육군헌병학교 출신 ‘헌칠회’ 주문원 옹
‘나라 위해 싸우다 죽는 게 가장 값지다’
아버지께서 늘 말씀
두려움보다 나라 지키겠다 열정 커
고교 2학년 때 육군헌병학교 7기생 입교
부산 14개 학교서 1700여 명 모여
헌7학병 전투현장서 전선 유지하고
주요 길목 안내하는 등 필수 임무 맡아
전쟁 중 9사단·육군형무소서 복무
장교로 임관해 1959년 중위로 전역
헌병학교 7기 모임 ‘헌칠회’ 1999년 첫발
동기들의 활약상 재평가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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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군사경찰’로 이름을 바꾼 ‘헌병’은 군 내 기강 확립, 사건 수사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적과 직접 부딪치는 전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6·25전쟁의 치열했던 전장 곳곳에는 헌병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전쟁 발발 이후 당시 육군헌병학교를 거쳐 곧바로 전장에 투입된 10대 참전용사들의 활약상이 눈에 띈다. 연중기획 ‘정전협정 70년, 참전용사에게 듣는다’ 서른 번째 주인공은 헌병학교와의 인연을 한평생 이어가는 주문원(90) 옹이다. 글=배지열/사진=김병문 기자
1677명의 학생, 헌병으로 거듭나다
1950년 6·25전쟁 발발 후 후퇴를 거듭하면서 부산으로 옮겨 온 임시정부를 따라 그곳에 자리 잡은 육군헌병학교. 당시 17세로 경남공립상업중학교(현 부경고) 학생이던 주옹과 헌병학교와의 인연은 부산에서 시작됐다.
“1950년 8월 28일이었습니다. 아직 날짜도 잊지 않고 있네요. 당시 부산지역 중학생(현 고등학생)부터 대학교 2학년까지 학생들을 대상으로 헌병학교 지원을 받았습니다. 전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교내 학도호국단에서 중대장을 맡고 있기도 했고, 꼭 참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옹에게는 전장에 대한 두려움보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열정이 더 컸다.
“아버지께서 ‘남자는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게 가장 값지다’고 늘 말씀하셔서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4형제 중 장남인데 ‘장남이 모범적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신감과는 별개로 주변에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옹은 “큰 보자기에 바느질한 주머니를 갖고 있으면 행운이 깃든다는 말이 있었다”며 “동네 사람 1000명 정도가 며칠씩 서로 돌려 가면서 바느질을 해 줬는데 그걸 허리에 두르고 집을 떠나왔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그는 헌병학교 학생이 됐다. 당시 부산에서 그를 비롯한 지역 14개 학교 재학생 1769명이 육군헌병학교 7기생(헌7학병)으로 입교했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모였지만 교육시설과 환경은 열악했다. 주옹은 “식기가 따로 없어 대부분 주먹밥을 먹었고, 학교 교실로 쓰던 공간에서 모든 교육생이 다닥다닥 붙어 지내야 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헌병 직별교육을 받았다. 기본적인 범죄수사 관련 내용과 교통정리 방법부터 포로 취급 및 호송, 주요 요인·시설물 경비와 군기 확립에 관한 내용이었다. 최종 1677명이 졸업해 전방 군단·사단의 헌병대대와 포로경비대대에 배치됐다.
전장 곳곳 누빈 용사, 장교 임관까지
주옹과 동기생들이 전장에 투입된 건 헌병학교 교육과정을 마친 그해 10월.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의 서막을 알리던 때였다.
당시 헌병은 점령지에서 치안 확보, 포로 후송 및 관리, 국군 중 탈영 및 부상자 등 낙오자 관리까지 다양한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군 죄수 관리 및 부대 이동 시 후속 관리와 인도·인계업무도 있었다. 주옹과 동료들은 전시 경찰의 임무도 담당해 국가 주요 인사 경호까지 도맡았다. 서울 한국은행에서 보관하던 금괴를 부산까지 옮긴 것도 헌병이었다.
주옹은 “전쟁 이전과 비교해 부대 규모가 커지면서 부대별 병력 보충이 시급한 상황이었다”며 “실제 적과 맞부딪힐 가능성은 작지만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헌병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때였다”고 기억을 전했다. 직접 적과 대면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지만, 항상 전투태세를 대비했던 건 마지막까지 점령지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전방부대가 이동했다가 후퇴하는 상황이면 헌병은 차량과 인원이 안전하게 이동할 때까지 그곳을 지켜야 합니다. 보안상 위반되는 사항이 있는지 확인하고 다 처리해야 하니까요. 그러면 적이 거의 눈앞까지 와 있습니다. 그래서 헌병학교 동기생 중 실종과 행방불명 인원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내민 ‘헌7학병 순직, 실종, 행불, 희생자 명단’(2021년 5월 기준)에는 전사 127명, 순직 10명, 실종 6명, 행방불명 49명으로 192명이 안타깝게 모교로 복귀하지 못한 것으로 집계돼 있었다.
젊음과 패기로 맞서려 했던 전장에서도 배고픔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당시 보급품을 나르는 지게부대가 따로 있었습니다. 물과 양식을 가져다줘야 하는데, 이들이 공격받아 사망하거나 길이 끊기면 고지에 있는 장병들은 꼼짝없이 굶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굶는 날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전쟁 중 9사단과 육군형무소에서 복무한 주옹은 이후 장교로 임관했다. 1953년 6월 전역과 동시에 보병학교 헌병과 간부후보생 갑종장교 67기로 군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이후 1헌병대대 조사과장으로 일하다 1959년 중위로 예편했다.
그는 전쟁 통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5남매(4남 1녀)의 장남으로 가장 역할을 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 와중에도 군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1968년 부산 영도구 대평동 예비군 중대장을 맡은 그가 뛰어난 성과로 전국 예비군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 그때 받은 상금으로 교육관과 각종 시설을 확충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어 국군홍보관리소(현 국방홍보원)에서 일하다 1994년 정년퇴직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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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마음속에 있는 ‘헌칠회’ 동기들
주옹은 헌병학교 7(칠)기 모임인 ‘헌칠회’ 활동에 진심이다. 그는 “예비역들이 사회에서 자리 잡고 나니 모임을 하자고 해서 시작했다”며 “지금도 매달 7일 부산 서면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나는데, 대부분 이곳 출신이라 연락이 쉽게 닿았다”고 설명했다.
헌칠회는 1999년 창설 당시 300여 명으로 첫발을 뗐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난해 벌인 재조사에서는 인원이 3분의 1인 100명가량으로 줄어들었다.
이들은 전쟁 중 동기들의 재평가에 앞장섰다. 헌7학병은 전투현장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주요 길목을 안내하는 등 필수 임무를 맡았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는 흥남철수작전과 전쟁포로 수용 및 반공포로 석방작전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해 국군이 압록강과 혜산진 등까지 진격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그러나 성과 뒤에는 희생도 뒤따랐다. 강원도 철원군 김화지구전투에서 70명 이상이 적의 급습에 목숨을 잃은 것. 주옹은 “헌병이었지만 보병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작전에 투입돼 고지를 점령한 헌병 중대가 있었을 정도였다”며 “당시는 국군이 워낙 빠르게 북진하던 상황이라 남아 있던 적에게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공격당했다”고 전했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매년 6월 27일 부산 부산진구 어린이대공원에서 추모행사를 거행한다. 헌칠회는 또 이들의 애국 희생정신을 잊지 않고 후대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 부산시와 함께 2001년 이곳에 ‘헌7학병 6·25참전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는 2003년 5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전우들이 공격당했던 시간과 장소를 잊지 않기 위해 매년 10월 21일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에서도 ‘희생 전우 추도식’을 진행한다.
주옹은 정전 70주년을 맞아 전쟁의 경험이 희미해진 지금도 우리의 힘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한 번씩 병역을 기피하는 사람들의 뉴스를 보면 분통이 터진다”며 “다시 전쟁을 겪지 않으려면 투철한 애국심과 군인정신으로 우리 땅을 지켜낸 선배 전우들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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