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조명탄_김은경 작가] 받고 싶은 것을 상대에게 줄 것

입력 2023. 01. 16   15:49
업데이트 2023. 01. 1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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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작가·프리랜서 에디터
김은경 작가·프리랜서 에디터


연애 상담 콘텐츠에 푹 빠졌던 시절이 있다. 남의 연애 이야기가 어찌나 재밌던지 알고리즘이 안내하는 콘텐츠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라디오처럼 듣고 있었는데 한 가지 귀를 쫑긋하게 만든 조언이 있었다. 바로 ‘내가 받고 싶은 것을 상대에게 먼저 줘라’라는 것. 예를 들어 썸을 갓 타기 시작한 상황이면 톡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망설이다가 이도 저도 아닌 말을 해 대화가 단절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상대가 내게 물어줬으면 하는 것을 먼저 묻고, 상대가 해줬으면 하는 배려를 내가 먼저 해주면 오버하지 않으면서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다는 것이다(물론 ‘상식’이라는 것이 전제돼야 하는 스킬이다). 이럴 수가! 나는 과거에 이어지지 못한 상대들을 떠올리며 탄식했는데 문제는 연애 지식이 늘었다 한들 이를 검증해 볼 상대가 없었다. 그렇게 이 말은 뇌 한구석에 저장돼 있다가 생각지 못한 순간에 진가를 발휘했다.

몇 년 전, 한 회사에 들어갔다가 곧 퇴사한 적이 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던 가족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조용히 시작했다가 조용히 마무리하는 편이지만 그때는 썩 마음에 드는 조건으로 회사에 다니게 돼 신이 났던 것 같다.

출근 몇 주 전 부모님에게 회사에 다니게 됐다고 설명했는데 인생 참 얄궂지, 생각보다 금방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퇴사라 혼란스러웠지만 부모님에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가 더 고민이었다. 회사를 그만뒀다고 말하면 왜 그만두었냐, 다른 계획이 있느냐, 온갖 질문 세례를 받을 것이 뻔한데 나는 답을 할 만한 정신머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숨기고 있을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갓 차를 사서 주말마다 아버지에게 운전 연수를 받고 있었고, 아버지는 전 회사도 연수 코스에 넣었으니까!

아버지는 내가 아는 한 가장 고집이 센 사람이었고 코스를 바꾼다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퇴사한 회사에 나타날 것인가, 아버지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고 전 회사에 가지 않을 것인가! 둘 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끔찍한 상황이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순간 이 말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받고 싶은 것을 상대에게 먼저 줘라!

아버지와 회사까지 운전해 보기로 한 전날 밤, 나는 부모님이 내 퇴사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기를 바라는지 생각해 봤다. 나는 부모님이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원했다. 오히려 더 신나는 일들이 펼쳐질 거라며 나를 응원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내일은 퇴사 소식을 신나게 전해보자. 그리고 다음 날 오전, 아버지가 오늘의 운전 코스를 이야기하기 전에 의자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오늘 회사까지 운전 안 해도 돼. 나 회사 그만뒀어!”

정말 신나는 일이라는 양 씩 웃으며, 어깨도 으쓱으쓱 들썩이면서.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회사 그만두니 속이 다 후련하다며, 차도 샀으니 당분간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쉬어야겠다고 아무 말로 오디오를 메웠다. 그리고 몇 초 후, 아버지는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오늘은 어디에 가냐?”

퇴사 이야기는 그렇게 끝. 가족 중 내 퇴사 소식을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연애 코치의 말대로 내가 받고 싶은 것을 먼저 주니 원하는 것을 얻은 것이다.

세상에는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이미 이룬 듯 행동하고, 그렇게 하면 어느덧 그게 현실이 된다고 하는데 이제는 이 법칙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알 것도 같다. 그날 우리는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섬에 가 해물칼국수를 먹었다. 나는 왠지 신이 나 칼국수를 먹는 내내 종알종알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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