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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광기의 ‘네로 명령’은 마약 때문이었을까?

입력 2023. 01. 04   16:06
업데이트 2023. 01. 04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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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약물에 중독된 ‘환자 A’- 노르만 올러,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

 
1930년대 독일 각성제 ‘페르비틴’ 확산
필로폰 주원료 함유…만병통치약 둔갑
나치, 병사에 대량 먹인 뒤 전투 내보내
독 공군 조종사들엔 ‘폭격기 알약’ 별칭
괴링·힘러·롬멜 등 고위급도 즐겨 복용
히틀러 주치의 처방 기록 통해 수면 위로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 책 표지. 열린책들 제공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 책 표지. 열린책들 제공




독일 저널리스트 노르만 올러의 논픽션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열린책들, 2022)는 모르핀의 등장으로 달라진 전쟁의 모습과 나치의 마약 남용 실태를 다룬 흥미로운 저서다. 이 책은 19세기 초 독일 베스트팔렌주 파더보른에서 21세의 젊은 약사 프리드리히 빌헬름 제르튀르너가 양귀비에서 모르핀을 분리 추출하는 데 성공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양귀비의 걸쭉한 즙, 즉 아편은 다른 어떤 물질보다 통증을 덜어주는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양귀비는 재배 조건에 따라 작용 물질의 농도가 천차만별이었다. 제르튀르너의 모르핀 분리 추출 성공은 인류 전체 역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모르핀은 인간의 고통을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바꿨고, 독일 제약업체는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850년경 주사기가 개발되자 모르핀 진통제는 미국 남북전쟁(1861~1865)과 보불전쟁(1870~1871)에서 대량으로 사용됐다.

전장에서 휴식을 취하는 독일군. 필자 제공
전장에서 휴식을 취하는 독일군. 필자 제공



1920년대에 이르러 독일에서는 모르핀을 함유한 의약품의 생산이 급격히 늘어났다. 독일은 또 다른 화학 물질에서도 선두를 달렸다. 세계 코카인 시장의 80%를 장악했고, 제약업체 메르크사에서 생산된 코카인은 우수한 품질로 정평이 나 중국에서 대량으로 무단 도용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경기 침체로 인한 괴로운 현실을 떠나 약을 이용해 환각으로 도피하는 독일인들이 폭증했다.

1933년 집권한 나치가 마약 퇴치 정책을 펼쳐 모르핀과 코카인 소비는 크게 줄어들었지만 대신 새로운 합성 각성제가 등장했다. 헤로인, 코카인, 그리고 메스암페타민이 주성분인 ‘페르비틴’이 만병통치약으로 둔갑해 학생, 간호사, 배우, 작가, 노동자, 소방관, 미용사, 운전자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에서 소비됐다. 심지어 메스암페타민이 함유된, ‘프랄린’이라는 초콜릿 과자도 생산됐다. 베를린의 광고탑, 전철, 옴니버스, 도시 철도, 지하철 곳곳에 페르비틴 광고 포스터가 붙었다. 광고에는 순환기 장애, 무기력, 우울증 같은 증상을 완화해준다고 적혔다.

메스암페타민은 필로폰(히로뽕)의 주원료로 중독성과 부작용이 심각해 오늘날 대표적인 금지 약물로 규정된 물질이다.

각성제 페르비틴. 처방전 없이도 약국에서 구매가 가능했다. 열린책들 제공
각성제 페르비틴. 처방전 없이도 약국에서 구매가 가능했다. 열린책들 제공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국방군은 제약업체에 페르비틴 3500만 정을 주문했다. 제약업체는 공장을 24시간 가동해 하루 80만 정이 넘는 페르비틴을 생산했다. 프랑스 침공 작전의 성공은 신속한 진격에 달려 있었다. 독일 국방군은 전투 직전 병사들에게 페르비틴을 복용시켰다. 페르비틴의 각성 효과는 36시간 이상 유지됐다. 각성효과에 힘입어 독일군은 일반적인 통념을 뛰어넘는 속도로 진격할 수 있었다.

야간 비행에 나서는 독일 공군의 조종사들도 페르비틴을 대량으로 복용한 후 출격했고, 페르비틴은 ‘폭격기 알약’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1917~1985)도 전쟁터에서 페르비틴 중독에 시달렸다. “기회가 되면 페르비틴을 다시 보내주세요. 보초를 설 때 아주 유용해요.” “가능한 한 빨리 페르비틴을 보내주세요.” 저자는 부모님에게 페르비틴을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하인리히 뵐의 편지들을 발굴해 책에 실었다.

페르비틴 중독은 병사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저자는 광범위한 자료를 분석해 나치 2인자 헤르만 괴링,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 항공국장 에른스트 우데트, 그리고 에르빈 롬멜 장군도 페르비틴을 즐겨 복용했음을 지적한다.

히틀러 역시 각종 약물을 복용했다. 1941년 8월부터 1945년 4월까지 히틀러의 주치의였던 테어도어 모렐(1886~1948)이 남긴 사적인 편지들은 히틀러가 마약에 의존했음을 증명한다. 히틀러를 ‘환자 A’로 지칭하는 모렐의 처방 기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1100회 이상 약물을 복용하고, 800회 이상의 주사를 맞았다. 비타민, 포도당, 스테로이드, 페르비틴, 브롬화칼륨, 아트로핀, 코카인, 아드레날린 등 각종 약에 의존하면서 히틀러는 점차 판단력을 상실했다.

영화 ‘다운폴’에서 불안과 강박에 휩싸인 히틀러의 모습. 필자 제공
영화 ‘다운폴’에서 불안과 강박에 휩싸인 히틀러의 모습. 필자 제공




전쟁 말기 벙커 생활을 하며 마약에 빠진 히틀러는 모렐에게 더욱 의존했고, 마약을 맞지 않고는 작전 회의에 참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육체와 정신이 무너진 히틀러는 약에 절은 상태에서 무모한 명령을 남발했다. 그 결과 수십 만의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패전이 목전에 다가온 1945년 3월 19일, 히틀러는 연합군과 소련군이 독일 국내로 진입하자 가스, 수도, 전기, 통신, 교통 시설을 모두 파괴하라는 파멸적인 명령(네로 명령)을 내렸다. 당시 히틀러는 약물 후유증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다행히 지각이 있는 일선 지휘관들은 이 광기 어린 명령을 거부했다.

테어도어 모렐. 필자 제공
테어도어 모렐. 필자 제공




한편 모렐은 히틀러의 주치의라는 지위를 이용해 노골적으로 사적인 이익을 취했다. ‘비타물틴’이라는 영양제를 출시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고, 점령지에서 나치가 몰수한 기업을 싼값에 인수해 각종 약물을 생산했다. 우크라이나의 도축장에서는 고가의 도핑제와 스테로이드 생산 원료가 되는 동물들의 갑상선, 부신, 고환, 전립선, 난소, 쿠퍼샘, 담낭, 심장, 폐 등을 싹쓸이했다.

모렐이 주조한 약물 중 ‘오이코달’로 불리는 합성마약은 특히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켰다. 오이코달의 각성 효과는 모르핀의 두 배에 달했다. 모렐은 오이코달의 부작용을 점검하려고 전쟁 포로와 강제 수용소의 유대인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진행했다. 모렐은 실험대상자들에게 오이코달을 주사한 다음 죽을 때까지 걷게 해 약물의 각성 효과를 관찰했다.

종전 후 모렐은 미군에 체포됐으나 학살 등 전쟁 범죄에 가담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처벌받지 않았다. 모렐은 3년 후 건강 악화로 사망했다. 종전 후 미군은 많은 독일 약사들을 미국으로 데려가서 각성제 개발을 계속하게 했다. 페르비틴을 비롯한 각성제는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에도 활용됐다.

이 책은 순수 아리아인의 혈통을 강조하면서 인종 차별정책을 펼쳤으나 내부에서는 온갖 마약성 물질을 취한 나치와 히틀러의 위선을 조명한다. 인간의 고통을 줄이려는 목적으로 만든 약물은, 역설적으로 나치에 악용돼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겼다.

물론 나치의 범죄와 광기의 결정적 요인이 ‘약물’에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자이자 독재자였던 히틀러의 한 단면을 증명하는 퍼즐 조각의 하나로는 손색이 없다. 독일 문서 보관소를 뒤져서 페르비틴 지침서와 모렐의 처방 기록 등을 수집한 자료와 인물의 생생한 묘사는 독자를 흡인력 있게 끌어들인다. 저명한 전쟁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는 “히틀러의 마약 중독을 이보다 더 잘 입증해 주는 책은 없다”라는 찬사를 남겼다. 이 책은 영화판권을 사들인 파라마운트사에 의해 곧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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