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국방안보

워커 장군, 낙동강전선 지켜낸 영웅…전국 곳곳에 장군의 흔적

이주형

입력 2022. 12. 30   16:33
업데이트 2023. 01. 01   14:49
0 댓글

'6·25전쟁 영웅' 워커 장군의 길을 따라서

최후 방어선 지키고 인천상륙작전 기틀 마련 
워커힐호텔·아파트…이름 붙여 의미 기려
장군 집무실 쓰였던 부산 부경대 워커하우스
평택 캠프 험프리스 내 높이 3m 기념 동상
‘장군의 공 아는지…’ 전사지 주변 관리 아쉬움

 

대한민국은 미국과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이래 혈맹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70년에 이르는 세월, 이 기간 동안 양국의 발전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기여해 온 수많은 사람이 있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초대 미 8군사령관인 월턴 워커(Walton H. Walker·1889~1950) 장군이다. 그는 6·25전쟁 중 최후 방어선인 낙동강전선에서 ‘지키느냐, 아니면 죽느냐(Stand or Die)’를 외치면서 전선을 사수해 역전의 발판을 이뤄 냈다. 올해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 남아 있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한반도 고수(固守)를 주장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서울 그랜드워커힐호텔 경내에 있는 워커 장군의 추모비 모습. 백승윤 기자
서울 그랜드워커힐호텔 경내에 있는 워커 장군의 추모비 모습. 백승윤 기자

 
서울 광진구 그랜드워커힐호텔. 이 호텔 경내에는 장군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1987년 10월 5일 한미친선군민협의회에서 건립한 것으로 현재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돼 있다. 워커 장군을 향한 발걸음은 이곳을 첫 목적지로 삼았다. 초행길이지만 쉽게 찾을 줄 알았다. 장군의 이름을 딴 호텔이기에 근무하는 분들은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랐다. 어디에도 위치를 알려 주는 안내판이나 이정표 하나 없었다. 친절한 호텔 도어맨도, 경내를 운행하는 셔틀버스 운전사분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정상부에 있는 레스토랑(피자힐)에 물어보니 그제야 답이 돌아온다. 호텔 본관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 사잇길이 보이면 그리로 내려가면 된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길은 호텔에서 피자힐로 올라가는 계단길이었다. 더욱이 동절기에는 안전사고 예방 차원에서 길을 막아 놓아 초행자들을 더 헤매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찾은 추모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 우리가 장군을 특별히 추모하는 것은 6·25전쟁 초기 한반도 고수를 주장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여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한 그 공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처럼 워커 장군은 6·25전쟁 영웅이었다. 미국 텍사스주 벨턴 출신인 그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쳐 6·25전쟁에 참전했다. 1950년 7월 13일 더글러스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에 의해 한반도로 파견된 워커 사령관(당시 중장)은 ‘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 활약했다. 8월에서 9월 사이 낙동강 부근 방어선에서 끝까지 국군과 유엔군이 맞서 싸운 결과 대한민국의 최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낙동강방어선(일명 워커라인)은 최후의 보루였다. 만약 낙동강방어선이 뚫리면 한국 정부는 제주도로 쫓겨나거나 혹은 해외에 망명정부를 수립해야 했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전투를 지휘했던 것이 워커 장군이었다.

이 때문에 1983년 대한민국 국방부는 워커 장군을 6·25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4대 명장 중 하나로 선정하며 그의 공로를 기렸다. 당시 그와 함께 뽑힌 인물은 김홍일·김종오·맥아더였다.

한편 서울 광나루에 세워진 워커힐호텔은 1962년 12월 26일 준공됐다. 당시 국내 언론이 ‘웅자(雄姿) 나타낸 동양 최대의 향락지(享樂地)’ ‘동양 굴지의 오락센터’라고 타이틀을 잡아 보도할 만큼 큰 관심을 모았다. 호텔 주 건물이 워커(Walker) 장군의 이니셜인 W자 모양을 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당시 정부는 주한미군이 일본으로 휴가를 떠나는 이유가 국내에 적당한 휴양시설이 없기 때문이라며 호텔 건축을 추진했다. 대지 면적은 약 63만1000㎡(약 19만1000평)이며, 건설비가 내부 설비비 등을 제외하고 당시 금액으로 5억1700만 원이 들었다고 한다.

 

서울 워커힐아파트. 백승윤 기자
서울 워커힐아파트. 백승윤 기자

 
워커힐호텔 인근에는 역시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워커힐아파트가 있다. 1978년 서울 태릉사격장에서 열린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선수촌으로 사용됐다. 특정 외국인들이 집단적으로 머무른 최초의 아파트였다. 워커힐아파트는 복싱선수들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복싱의 대모’로 불리는 프로모터 심영자 여사의 자택이 있었던 까닭이다. 복싱선수들은 이곳에서 합숙하면서 시합을 앞두고 훈련을 했다. 장정구, 문성길, 최요삼 등 유명 선수들이 이 집을 거쳐 갔다고 한다.


전사지 알리는 전신주 표지판에는 광고 흔적 남아 씁쓸

 

서울 도봉역 인근에 있는 워커 장군의 전사지 표지석. 이주형 기자
서울 도봉역 인근에 있는 워커 장군의 전사지 표지석. 이주형 기자

 

워커 장군의 실제 전사지. 붉은 선으로 표시된 곳에 워커 장군의 위업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의미 있는 표지판이지만 주변 간판과 광고물 때문에 지나치기 쉬워 아쉬움이 남는다. 이주형 기자
워커 장군의 실제 전사지. 붉은 선으로 표시된 곳에 워커 장군의 위업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의미 있는 표지판이지만 주변 간판과 광고물 때문에 지나치기 쉬워 아쉬움이 남는다. 이주형 기자


발길을 도봉구로 돌렸다. 워커 장군의 전사지(戰死地)를 찾기 위해서다. 전사지 표지석의 위치는 1호선 전철역 도봉역 건너편, 바로 도로 옆이다.

그는 낙동강방어선전투가 있던 그해 12월 23일 성탄절을 앞두고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샘 워커 대위는 6·25전쟁 최전방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했고, 이 공로로 은성무공훈장을 받게 됐다. 워커 장군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지프차를 타고 미 9군단 예하 24사단 전투지휘소를 향해 이동하던 중 국군 소속의 트럭과 크게 충돌해 세상을 떠났다. 그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장병 중 계급이 가장 높은 군인이었다.

장군이 사고로 목숨을 잃자 미 정부는 대장 계급을 추서했다. 그때 워커 장군의 시신을 미 본국으로 운구하는 호송 책임을 맡은 사람이 바로 아들 샘 워커였다. 워커 장군의 직속상관이었던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이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을 때 샘 워커 대위는 “부하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샘 워커 대위는 맥아더의 명령에 가까운 강권이 있은 뒤에야 미국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른 다음 복귀해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이후 대장까지 진급했다. 미 육군 역사상 최초의 부자 4성 장군이었다.

장군의 전사와 관련해 후일담이 있다. 워커 장군의 사망에 격노한 이승만 대통령이 그 운전병을 당장 사형시키라고 노발대발했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사형은 당연한 처사로 보였다. 하지만 장군의 아들을 비롯한 유가족의 탄원, 여러 미 8군 관계자의 만류가 이어졌다. 결국 사형 판결은 징역 3년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하나 더. 표지석의 위치는 워커 장군의 실제 전사지가 아니다. 표지석 윗면에는 ‘전사한 곳은 도봉동 596-5번지’라고 적혀 있다. 표지석에서 200여 m 떨어진 곳이다. 전사지는 사유지이고 건물이 들어서 부득이 도로 옆 이곳에 표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실제 전사지에는 전신주에 부착된 금속표지판과 한 가게의 입구 위에 놓인 표지석이 역사적 사실을 알린다. 그런데 전신주 표지판에는 이러한 의미도 모른 채 광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씁쓸함을 자아낸다.


동상, 기지 이름, 축제행사의 일환으로 위업 기려

 

평택 캠프 험프리스 워커 장군 동상. 조종원 기자
평택 캠프 험프리스 워커 장군 동상. 조종원 기자

 
장군의 흔적은 이외에도 전국 곳곳에 있다. 먼저 경기도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 장군의 동상이 있는 장소다. 높이 3m(지면에서는 높이 5.4m), 폭 11m이며 미 8군사령부 건물 앞에 있다. 초대 미 8군사령관인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2010년 6월 23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 안에 세워졌는데, 미 8군이 용산을 떠나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하며 함께 평택으로 옮겼다.

대구와 경북 칠곡도 마찬가지다. 대구에는 캠프 워커가 있다. 미 육군기지로 활주로와 관제탑, 격납고 등의 시설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 비행장과 탄약고로 사용했다. 미군이 이곳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59년이며, 주한미군의 후방 재배치가 끝나면 캠프 워커의 USAG Daegu(Area IV)는 평택 오산 공군기지, USAG 험프리스와 함께 주한미군의 양대 축이 될 예정이다.

칠곡은 낙동강 세계평화 문화대축전을 개최하며 낙동강방어선전투 등을 소개하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도 제9회 낙동강 세계평화 문화대축전 및 제13회 낙동강지구 전투 전승행사를 했다. 장군의 아들 샘 워커도 2019년 참석한 바 있다.

 

부경대 워커하우스. 6·25전쟁 당시 워커 장군의 집무실이었다. 이경원 기자
부경대 워커하우스. 6·25전쟁 당시 워커 장군의 집무실이었다. 이경원 기자


서울에서 시작한 워커 장군의 흔적은 제2의 도시 부산에 도착하며 끝을 맺는다. 바로 부경대 워커하우스(Walker House)다.

워커 장군은 1950년 9월 6일 미 8군사령부를 대구에서 부산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로 옮겨 도쿄의 맥아더 장군과 통신을 통해 작전계획을 협의했다. 부경대 종합강의동 동쪽에 두꺼운 돌벽으로 된 방호건물형 돌담집(높이 6.45m, 면적 308㎡)이 장군이 집무실로 사용했던 장소다. 사실 장군이 이곳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않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戰勢)가 호전됨에 따라 미 8군사령부는 그해 9월 24일 대구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수의 최후 보루였던 낙동강전선의 지휘본부로서, 또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며 반격의 물꼬를 터 준 역사의 현장이었다는 의미는 결코 퇴색되지 않는다. 워커하우스는 1990년 화재 이후 2020년에 원형대로 복원됐다. 이주형 기자

 


김리진 워커대장추모기념사업회장

“감사의 마음 잊지 말아야”

 


워커 장군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김리진(97) 워커대장추모기념사업회장이다. 참전용사이기도 한 김 회장은 워커 장군의 사망 지점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그를 추모하는 기념비 하나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1979년 워커대장추모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미군 자료를 받아 3년간 조사한 끝에 1986년 도봉동 596-5번지가 그 장소임을 밝혀냈다. 이어 이듬해인 1987년에는 워커힐호텔에서 추모비 제막식을 하고, 2009년엔 도봉역 인근의 전사지 표지석도 세웠다. 실제 전사지의 금속표지판도 그가 2014년 5월 사비를 들여 만든 것이다.

1991년부터는 매년 12월 워커 장군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지금은 건강이 좋지 않아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있는 김 회장은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며 “대한민국을 위해 참전했던 미국을 비롯한 해외 참전용사들을 기념하며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주형 기자

이주형 기자 < jataka@dema.mil.kr >
사진=  이경원 기자 < photo >
사진=  백승윤 기자 < soseem >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