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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편찬연구소와 함께 하는 한미동맹 70년 여정] 기고-한미동맹의 성립 <상> 한국 입장서 본 한미상호방위조약

김철환

입력 2023. 01. 01   15:24
업데이트 2023. 01. 0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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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 대통령 결연한 의지… 한미동맹 ‘초석’ 놓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했지만 
대한제국 일본 식민지 전락 묵인하자
“미국은 한국 도울 의무있다” 강조 

6·25전쟁 정전에만 관심보인 미국에
“반공포로 석방·단독 전쟁 수행 ”압박
마침내 ‘한미상호방위조약’ 이끌어내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변영태(오른쪽) 한국 외무부 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부 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서에 정식 서명하고 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변영태(오른쪽) 한국 외무부 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부 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서에 정식 서명하고 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에서 양국 대표의 서명이 담긴 마지막페이지 원본 사진. 사진=외교사료관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에서 양국 대표의 서명이 담긴 마지막페이지 원본 사진. 사진=외교사료관

 

강승모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부 연구원
강승모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부 연구원



한미동맹 70주년인 2023년에는 다양한 범정부적 기념행사가 추진된다. 국방일보는 이에 발맞춰 『한미동맹 70년사』 발간을 준비 중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함께 한미가 함께한 70년의 시간을 돌아보는 기획연재를 시작한다. 이를 통해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동맹의 긍정적 역할과 기여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하고 안보의식을 제고해 나가고자 한다.

한미동맹 70년의 첫 걸음은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군편소와 함께하는 한미동맹 70년 여정’을 시작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각각 대한민국과 미국 입장에서 바라본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성립을 소개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 , 한미동맹 필요성 강조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헌법 전문에 의하면 대한국민은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고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민주주의제제도를 수립하여…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국가의 최고 목표로 독립, 민주주의, 단결, 번영, 국제평화 등을 강조함을 알 수 있다. 이는 현행 헌법에서도 유지되고 있다. 한미동맹의 근간이 되는 상호방위조약의 성립을 이해하는 데 이러한 원칙들을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 경험 또한 중요하다. 특히 주목할 점은 1882년 5월 22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기억이다. 본 조약 제1관은 조선과 미국이 “타국의 어떠한 불공평이나 경멸하는 일이 있을 때에 일단 통지하면 서로 도와주며, 중간에서 잘 조처하여 두터운 우의를 보여 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탈하려고 하자, 이승만 전 대통령은 본 조문을 근거로 미국이 대한제국을 도울 의무가 있음을 호소했다. 안타깝게도 미국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묵인했다. 후일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미국이 조약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도울 도덕적 의무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일찍부터 한미동맹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유럽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 북대서양조약이 1949년 4월 4일 체결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9년 5월 14일과 16일 공개 연설을 통해 북대서양조약과 유사한 동맹을 태평양에서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반공국가들 간 연대와 미국의 위상 제고를 피력했다.

또한 미국이 유럽과 안보조약을 체결했다면, 태평양에서도 안보조약을 체결해야 마땅하다고 첨언했다. 만약 다국적 태평양 동맹이 불가할 경우 미국은 대한민국과 단독으로 안보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한국은 북대서양조약 체결 거의 직후 한미동맹조약 초안을 작성했다. 1949년 4월 18일 작성된 초안에 의하면 한국이나 미국이 적국과 전쟁을 할 경우 양국은 ‘즉시’ 군사적으로 상호 지원하게끔 돼 있었다. 미국은 ‘군사력’을, 한국은 ‘시설’을 제공하는 동시에 미군 주둔을 허용한다는 게 골자였다.


1953년 10월 1일 정식 서명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실질적인 교섭은 6·25전쟁 발발 이후 진행됐으며, 정전협정 협상이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6·25에 피로감을 느낀 일부 국가들은 1950년 말부터 정전을 위한 물밑작업을 개시했다. 1951년 초부터 정전 협상이 현실로 다가오자 이승만 전 대통령은 격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협상은 1951년 7월부터 개시됐다. 이후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정전협정이 한국민에게는 사형선고와 마찬가지라며 협상을 끈질기게 반대했다. 정전은 한반도 통일을 목표로 하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결의 195와 대치되며, 공산권의 계략에 놀아나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해방 이후 소련과 함께 한반도를 분단시킨 미국은 통일을 도울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1952년 3월 21일 이승만 전 대통령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정전협정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최소한 한미 상호안보조약의 체결과 한국군 증강을 요구했다.

미국이 계속 정전에만 관심을 보이고 동맹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승만 전 대통령은 유엔이 관리하던 반공포로들을 1953년 6월 18일 일방적으로 석방해 미국을 압박했다. 당시 포로 문제는 정전 교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고 미국은 당연히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국과 동맹을 체결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은 강고했다. 그는 필요할 경우 한국은 단독으로 싸우겠다고 못 박았다. 그리고 정전협정의 대가로 미국은 ‘즉시’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을 시작해야 하며 한국군 증강을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협정 체결 이후 후속 정치회담에서 90일 이내에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면 미국은 정치회담에서 퇴장할 것을 요구했다.

정전을 위해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했던 미국은 결국 그의 요구에 응해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 개시에 동의했다. 대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정전 협상을 방해하지 않을 것과 포로 문제에 관여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또한 미측 초안에 대한 지지를 요구하며 이는 미 의회의 승인을 얻기 위함임을 강조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은 1953년 7월 4일부터 8월 8일까지 진행됐다.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가조인된 후 같은 해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정식 서명됐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18일 한미 합의 의사록 서명과 함께 발효돼 오늘날의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에 이르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고집했을까? 당시 기록을 보면 한국은 독립, 통일, 생존 등 여러 사항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한국 정부는 공산주의 및 일본으로부터의 위협을 염려했다. 미국이 20세기 초 대한제국을 지켜주지 않았다는 아쉬움 또한 작용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국이 다시 한번 한반도를 ‘방관’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맹의 구체적 조건으로 대한민국이 외부 세력의 침략을 당하면 미국이 군사 지원을 해줄 것과 대한민국의 군사력 강화를 위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요구했다. 아울러 미국이 1945년 한반도를 분할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미국은 한국의 통일을 도울 의무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맹 조약의 범위와 한국의 관할권이 한반도 전역에 적용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최종 반영되지는 않았으나, 통일을 향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염원을 엿볼 수 있다.


한국의 안녕이 자유세계의 안녕 

한편 상호방위조약 교섭을 지휘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몇 가지 원칙을 반복 강조했다. 하나는 반공주의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공산주의는 전 세계를 소련에 ‘복종’시키고 ‘노예’로 전락시키는 ‘매국주의’였다. 일제에서 겨우 해방된 한국으로서 공산주의는 납득할 수 없는 위험한 사상이자 세력이었다. 따라서 “평화가 희생되더라도 공의와 공정을 세우기 위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철학 중 또 하나 주목되는 부분은 한국과 자유세계의 운명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1948년 광복절 연설을 통해 이승만 전 대통령은 모든 나라는 ‘서로 의지’해야 하는 관계이고 전쟁과 평화의 화복안위를 ‘같이 당하는’ 위치임을 피력했다. 1950년 삼일절 기념 연설에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운명’이 ‘세계 모든 자유국가의 운명과 연결’돼 있음을 강조했다. 즉 한국의 안녕은 자유세계의 안녕을, 한국에서의 불화는 자유세계의 불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한국에서의 반공 투쟁이 한국은 물론 자유세계 전체를 위한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1949년 광복절 기념 연설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것은 “세계 모든 자유민들의 싸움을 싸우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6·25 발발 이후 이러한 주장을 더욱 강력하게 호소했다. 1950년 광복절 기념 연설에서는 6·25가 “단순한 내란이 아니고” 자유 진영 모두를 위협하는 전쟁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모든 나라를 정복”하려는 소련의 야심에 대항해 한국은 “우리를 위해서 싸우는 동안에 우방들은 각자 자기 나라를 위해서” 한국과 함께 싸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후에도 계속 국군과 유엔군의 노고와 희생을 치하하며, 그들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운명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러한 정신에 따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교섭했다. 결국, 세계를 품는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의 맹아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다.

김철환 기자 < Droid00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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