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에서 일하며 동시에 책 쓰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보니 가끔은 나의 진짜 직업이 뭔지 헛갈릴 때가 있다. 강연하는 곳에 초대받아서 가면 사회자가 처음에 나를 소개하는데 보통은 이렇다. ‘헌책방에서 일하며 작가이신…….’ 아니면 반대로 ‘작가이면서 헌책방에서 일하고 계신…….’ 이러나저러나 똑같은 말 같긴 하지만, 어떤 게 앞에 오고 무엇이 뒤에 오느냐에 따라서 기분이 묘하게 달라진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일은 서로 별개가 아니다. 헌책방에서 일하고 있기에 내가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며 반대로 작가로 활동하는 게 헌책방 일에 큰 도움이 된다. 책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일한다는 걸 빼면 완전히 다른 일 같지만, 내가 느끼기에 이 둘은 서로 엮여있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예전에는 누가 나를 부를 때 어떤 호칭으로 불러주느냐, 무슨 일하는 사람으로 대하느냐를 상당히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남의 시선은 딱히 중요하지 않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붙여주는 이름표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내가 가는 길을 꾸준한 마음으로 걸을 뿐이다. 그러다 보면 운이 좋아 어떤 성과를 얻을 수도 있고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길도 발견하게 되리라. 문제는 꾸준함이다. 세상일은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른다지만 꾸준함이 결국은 빛을 낸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미국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스티븐 킹에 비견될 만큼 훌륭한 스릴러 작품을 많이 썼다. 금세기 최고의 문제적 범죄자 캐릭터인 ‘리플리’를 창조한 사람이 바로 하이스미스다. 리플리는 범죄를 저지를 때 아무런 죄책감이나 긴장감을 느끼지 않고 거짓으로 꾸며낸 말을 본인조차 실제로 믿어버리는 독특한 인물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성향의 사람을 ‘리플리 증후군’이라 부른다. 하지만 소설가 하이스미스가 과연 처음부터 이런 명성을 얻게 될 줄 짐작이나 했을까? 하이스미스가 스릴러의 여왕으로 불릴 거라는 미래를 미리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본인조차도 말이다.
올해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았던 작품 중 하나를 꼽자면 하이스미스의 초기 단편을 모은 『레이디스』라고 하겠다. 이 책에 들어 있는 단편들은,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대표작에 견주면 조금은 싱거운 음식 같은 느낌이 든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서로 죽이고 싶은 사람을 대신 살해한다는 획기적인 트릭에 반해 히치콕 감독이 영화로 각색한 ‘열차 안의 낯선 자들’처럼 히트한 작품이 아니기에 지금껏 번역이 미뤄졌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레이디스』에 속한 짧은 소설 열여섯 편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읽어보니 실로 대단한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실험적이고 풋풋한 향기가 나는 이 초기 작품들에선 앞으로 하이스미스가 다루게 될 어두운 주제의식과 서스펜스의 한계치까지 몰고 가는 인물들의 심리적 묘사가 대부분 제시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이렇게 처음부터 자신이 써야 할 글의 방향을 잘 알고 꾸준히 걷고 있던 것이었다.
내가 처음 헌책방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주변 친구들이나 어른들은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 젊은 사람이 오죽이나 할 게 없으면 헌책방을 하냐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말들을 맘에 담고 있지 않다. 그들은 내가 가는 길을 모르고 대신 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아는 건 오직 꾸준함만이 길을 걷는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또 다짐한다. 앞으로도 내가 갈 길은 꾸준함 뿐이다. 꾸준함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결국 만족을 주는 건 꾸준하게 이 길을 갔을 때뿐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도 가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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