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지열
다시, DMZ-6 철원 육군3보병사단
어디서나 눈에 들어오는 북 오성산
치열한 저격능선전투 피땀 서린 곳
완벽 대비태세 자랑하는 백골부대
통문 3개 통과한 후에야 DMZ로…
언제 실전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긴장감 속에 매일 고강도 훈련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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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광만 남은 김화읍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딱 맞는 날씨였다. 취재 첫날부터 DMZ를 품은 이곳은 잿빛 하늘로 방문객을 맞이했다.
첫 여정은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김화군(현재 김화읍)의 이주마을 생창리에서 시작했다. 이곳에는 지역의 옛이야기를 보존한 ‘김화이야기관’이 있다. 과거 이곳은 국도 5호선과 43호선이 만나고, 금강산전기철도가 지나면서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물류·교통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은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철의 삼각지(강원도 평강·철원·김화 지역을 잇는 삼각 축선의 지형)’에 속하면서 정전협정 체결 후 폐허만 남아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1970년 10월 입주재건촌을 건립해 오늘에 이르렀지만, 과거의 영광만 남았다.
이어 DMZ 생태평화공원에 있는 용양보 탐방로를 걸었다. 용양보는 DMZ 남방한계선 내에 조성된 농업용 저수지다.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금강산전철 교각을 사용해 만들어졌다.
북에서 내려오는 남대천이 범람해 일대가 물에 잠기기도 한다. 이로 인해 지뢰가 떠내려올 수도 있다. 탐방로 양옆에 둘러쳐진 쇠울타리에 ‘지뢰(MINE)’라고 적힌 표지판을 보니 한편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출렁다리. 전쟁 당시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들이 오갔다고 알려진 다리가 이제는 세월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아 낡고 떨어져 나간 모습이다. 지지대가 되는 철선만이 앙상하게 남은 자태에 씁쓸함과 허무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멈춰 버린 시간을 채운 자연
지역 일대에는 시간이 그대로 멈춰 있는 곳이 많다. 일제강점기에 설치돼 6·25전쟁 당시 북한이 군수물자를 옮길 때 사용한 ‘끊어진 철길’도 그중 하나다. 꽁꽁 언 한탄천 위에 녹슬어 위태로워 보이는 철길은 우리 근대사의 아픔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다.
다음 목적지인 암정교에서도 그 감정은 이어졌다. 1917년 세워진 돌다리인 암정교는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김화와 평강, 금성을 잇는 ‘인마(人馬)의 다리’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교통로였지만 지금은 방치돼 있다. 바로 옆에 새로 만들어진 ‘신암정교’로 차들이 쌩쌩 달리는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앙상한 철근을 드러낸 채 시간의 풍파를 겪어 낸 모습에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성재산에 설치한 십자탑도 거센 바람과 오랜 세월을 견뎌 내고 있었다. 북한에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1979년 세운 이 구조물은 저격능선전투 현장을 지척에 두고 있다. 참전용사들이 들려준 저격능선을 직접 확인하니 가슴이 시려 왔다. 영화 ‘고지전’의 배경이 된 이곳은 43일 동안 고지 주인이 33차례나 바뀔 정도로 혈전이 벌어졌다. 70년 전과 비교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남아 있는 자연 앞에 허망함마저 들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오랜 시간의 공백을 채운 풍광이 곳곳에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북한의 오성산은 어딜 가나 눈에 띄어 우리 군에 분명 위협이 될 지형이었다. 그런데도 산등성이 앞으로 펼쳐진 만도벌판과 민들레벌판의 광활함은 보는 이를 압도했다. 자유롭게 DMZ를 넘어 다니며 그 아름다움을 즐기는 재두루미 떼를 바라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껴야 했다.
살아도 백골, 죽어도 백골
DMZ 어디에서나 우리를 반겨 준 건 하얗게 빛나는 백골(白骨)이었다. 일대를 방호하는 3사단, 백골부대의 상징이다. 사단은 창설 이래 150여 회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고, 1950년 11월 낙동강 방어선에서 진격해 북한 혜산진(압록강 연안)에 국군 최선봉으로 입성하기도 했다.
그만큼 장병들의 애정도 남다르다. 지금은 쓰지 않는 관측소(OP)나 많은 장병이 생활하는 소초 건물에는 반드시 백골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태극기와 유엔기가 나란히 걸린 백골 OP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경계초소로 활용하다 이제는 안보관광 코스로 자리 잡은 이곳에는 ‘살아도 백골, 죽어도 백골’이라고 쓰인 벽면부터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입구에는 ‘상승백골 수사불패’ 비석탑이 기개를 뽐냈다.
장병들의 기개와 의지는 첨단 장비를 등에 업고 더욱 상승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가며 수십 ㎞의 철책을 점검해야 했던 계웅산 OP 장병들은 이제 열상감시장비(TOD)와 폐쇄회로TV(CCTV), 철책의 작은 움직임까지 감지하는 장치 덕분에 한층 더 견고하게 경계작전을 전개한다.
살벌함·비장함 흐르는 통문 앞에서
‘귀하는 지금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가 관할하는 비무장지대로 진입(접근)하고 있는 중임’. 이튿날 사단 수색대대의 DMZ 투입 현장을 보기 위해 이동하던 중 만난 표지판 문구부터 이곳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했다.
‘통문은 전장으로 가는 문’이라는 무시무시한 문구가 새겨진 이곳은 DMZ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개인화기로 무장하고, 지뢰탐지기와 통신기 등 각종 장비를 갖춘 장병들이 투입을 기다리고 있다.
팀장을 맡은 김연웅 중위의 “다치지 말고 다녀옵시다”라는 한마디로 간단한 미팅이 마무리됐다. 이어 실탄이 든 탄알집을 받아 드는 장병들의 표정에서 비장함이 엿보였다. 탄알집을 결합·장전 후 김 중위가 총기별 이상 유무를 일일이 확인했다.
DMZ 내부에서는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김 중위가 가장 경계하는 것도 익숙함이다. “여기서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순간 모두가 위험해집니다. 지뢰탐지를 방심했다가 폭발하거나 적 사정거리 내에 들어 고사포탄이 날아오는 상황을 생각하면 섬뜩합니다. 비슷한 환경과 작전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통문을 지키는 인원들이 문을 3개씩이나 열어야 DMZ 내부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2열 종대로 선 인원들이 전방위 경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에게는 익숙한 길이겠지만, 처음 지켜보는 이의 입장에서는 왜 그렇게 찡한 감정이 들던지 차마 끝까지 행렬을 지켜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태희(소령) 부대대장도 이해한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저도 최근에 통문 내부작전을 했는데, 조금이나마 대원들의 마음을 이해하겠더라고요. 수색대대라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인원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긴장도 많이 하고 부담도 될 텐데, 그래서 긴장을 풀어 주려고 군장점검 때 빠지는 게 없게끔 더 챙겨 주려 합니다.”
철조망 위로 몸 던지고 실전 같은 사격도
수색대대가 위험을 무릅쓰고 늘 DMZ에 투입되는 건 특이사항을 확인하고 대비하기 위해서다. 언제 실전이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대응법을 숙달하고, 작전 중 오발사고 방지에도 만전을 기한다. 우리는 실수였다 해도 적에게 도발의 빌미를 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수색대대의 빈틈없는 대비태세의 비결은 끊이지 않는 훈련에 있다. 통문을 통과하는 인원이 막 작전에 투입될 때 대대 전선침투훈련장에서는 실전 같은 긴장감 속에 훈련의 막이 올랐다.
먼저 훈련장에 설치된 각종 장애물이 장병들을 맞이한다. 훈련장은 계속된 추위로 땅이 얼어 한 발 내딛기도 어려울 정도다. 풀마저 얼어붙어 밟을 때마다 뾰족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장병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훈련을 위해 몸을 던졌다. “실제 전기철책이라고 생각해!” 팀장인 박대운 중사의 한마디에 팀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절연장갑을 끼고 검전기로 전류가 흐르는지를 확인한 인원이 이상 없음을 알렸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고무패킹으로 철책을 감싸고 S자 고리를 양쪽으로 걸어 지나갈 공간을 확보했다. 후방 인원이 사주경계로 엄호하면서 전진을 도왔다.
철책 장애물은 바닥에 붙어 통과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이에 박 중사가 나서 철책 위로 모포를 깔고, 그 위에 엎드려 팀원들의 이동로를 확보했다. 박 중사는 “단계별 극복방법과 전술 행동을 미리 익혀 놓기 위해 매일 반복 훈련한다”고 설명했다.
훈련은 K3 기관총과 K1 기관단총 사격훈련으로 마무리됐다. 해가 중천에 뜬 낮까지 영하의 온도를 기록했지만, 장병들의 이마와 마스크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이었다.
DMZ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같은 공간에도 시간은 다른 모습으로 흐른다. 특히 70년 전 이곳 DMZ에서는 사방에서 생사가 오가는 순간이 펼쳐졌다. 지금은 후배 장병들이 그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철저한 훈련을 바탕으로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시간이 멈춘 듯한 DMZ가 그대로 보존되는 것도 이들의 노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안세현(중사) 진백골여단 백혼대대 분대장은 “선배 전우의 희생 덕분에 나도 지금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면 긴장을 늦출 수 없다”며 “그분들의 뜻을 받들어 목숨을 걸고 지켜내겠다고 늘 다짐한다”고 말했다.
미래 DMZ에는 어떤 시간이 흐를까. 그동안 이곳을 지켜온 백골부대의 의지라면, 그때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지 않을까. 장병들의 기개가 역사의 흐름에도 큰 영향을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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