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의 소박한 시절 재현 위해
천 작가 생면부지 미광화랑 찾아
전시 대성황 이루며 전국에 유명세
지역 중심으로 근·현대미술에 주력
숨어있던 귀한 작품 속속 소개도
미광화랑을 찾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2010년 국내 미술계의 중심작가이자 문화계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천경자 씨의 개인전을 개최해 전국에 이름을 알린 부산 미광화랑 외부 모습.
천경자(1924~2015)의 전시가 부산 광안리에서 열렸다. 때는 2010년, 장소는 미광화랑. 부산에서 천경자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서울의 메이저 화랑에서도 유치하기 힘든 천하의 천경자 작품전이 부산 광안리의 자그마한 미광화랑에서 열리다니.
부산은 우리나라 제2의 도시다. 도시의 크기에 비해 화랑의 숫자는 서울은 물론 가까운 대구에 비해서도 적은 편이다. 그나마 있는 화랑들도 해운대에 몰려 있다. 광안리는 소박한 곳이다. 요즘은 외지 사람들도 광안리 해수욕장을 많이 찾지만, 과거에는 부산 사람들만 찾는 광안리였다. 그런 광안리의 미광화랑에서 천경자전이 열렸다니 뜻밖이었다.
국내 미술계의 중심작가이자 문화계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그녀가 절필을 선언하고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 게 1998년이다. 소식이 끊어졌다. 어느 날 미국에 사는 그녀의 딸 이혜선으로부터 미광화랑으로 전화가 왔다. 미광화랑에서 천경자전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부산은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다. 한반도의 북쪽 남쪽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피란민이 부산에 몰려들었다. 이때 미술인들도 부산에 다 몰려들었다.
서울대 미대 등 미술학교도 다 부산에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환도를 했어도 이들은 당장 부산을 떠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평양 출신의 화가 송혜수(1913~2005)처럼 부산에 아예 눌러앉았다.
김환기, 박고석, 한묵, 이중섭 등 부산을 거쳐 간 미술인들은 너무나 많다. 천경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천경자는 1952년 부산 중구 남포동의 국제구락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수십 마리의 독사가 뒤엉켜 있는 모습을 그린 ‘생태’가 출품되었다. 충격적인 화면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천경자는 유명해졌다. 1959년에는 부산 중앙동 소레유다방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이때는 홍익대 교수로 재직할 때다. 천경자는 부산에서 두 번의 전시를 했던 셈인데, 부산에 대한 기억이 좋았다. 국내 화단에 실망하고 미국으로 간 천경자는 부산에서 보낸 소박한 시절이 그리웠다. 그 시절을 재현할 수 있는 자그마한 화랑을 찾았는데, 그게 생면부지의 미광화랑이었다. 얼떨결에 전시가 이뤄졌고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와 함께 대성황을 이뤘다. 천경자를 유명하게 만든 도시가 부산이었다.
그렇게 유명해진 천경자가 이번에는 부산의 자그마한 화랑을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미광화랑의 김기봉 대표는 충남 광천 사람이다. 1978년에 군 제대를 하고 작은 형이 사는 부산에 왔다가 부산의 매력에 빠져 정착하게 됐다.
1999년 부산 수영구 망미동 토곡에서 미광화랑을 열었다. 이후 광안리로 이전했다. 미광화랑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근·현대미술에 주력했다. 전시는 1세대 서양화가들이 주를 이룬다.
1999년 개관전에는 남관, 송혜수, 장리석, 최영림, 문신 등의 작품을 전시했다. 2000년에는 부산 작고작가 및 원로작가전이 열렸다. 김경, 양달석, 우신출, 임호 등 작고작가와 송혜수, 전혁림, 성백주 등 당시 원로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됐다. 부산 1세대 서양화가들의 전시를 기획하는 일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6·25 때 부산에는 수많은 미술인들이 북적였다. 전쟁이 끝나 화가들이 환도해도 그 후광이 부산에 남아 있었다. 1965년에는 서울 중심의 국전에 저항해 이준, 임호 등이 주도해 전국적인 규모의 ‘민전’을 기획해 전시회를 개최했다. 1960~70년대의 부산에는 실험미술 역시 왕성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부산미술은 중심을 잃고 산만한 흐름을 보여줬다. 그런 탓인지 도시의 크기에 비해 미술의 크기가 작아 보였다.
작가와 작품은 하나의 역사다. 작가를 엮고 작품을 모아서 전시하는 일은 역사를 정리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일에 부산의 미술계는 다소 무심했다. 다행히도 미광이라는 의욕 충만의 화랑이 등장해 부산의 미술사를 챙기면서 부산 미술의 르네상스를 꾀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2009년, 개관 10주년 전시로 기획된 ‘꽃피는 부산항’은 부산과 인연을 맺은 김경, 김남배, 김봉진, 김원, 김원갑, 김원영, 김윤민, 김종식, 나건파, 서성찬, 송혜수, 양달석, 오영재, 우신출, 임호, 조목하, 진병덕, 한상돈, 황규웅 등 19인의 화가들이 참여했다. 이후 ‘꽃피는 부산항’ 전시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제9회 ‘꽃피는 부산항’이 열렸다. 27인의 화가가 참여했다. 제1회 전시에는 안 보이던 김영교, 김영덕, 성백주, 신창호, 안세홍, 이득찬, 이규옥, 이석우, 임응구, 정상복, 채정권 등의 이름이 보인다. 임응구(1907~1994)는 부산 최초로 일본 유학을 한 서양화가다. 동생 임응식은 사진가로 유명하다.
전시는 작품이 있어야 가능하다. 근대미술은 작품이 귀하다. 그래서 전시가 힘들다. 그런데도 미광화랑이 전시를 연다고 하면 그동안 숨어있던 작품들이 어디선가 나타난다. 작품의 등장은 미술사를 새로 쓰게 한다. 미광화랑은 이 일을 끈질기게 반복하고 있다.
미광화랑이 근대미술에만 집중하는 건 아니다. 정복수, 김난영 등 부산과 인연이 있는 중견작가들의 전시도 열심히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모더니즘 조각가 김청정(1941~ )의 전시를 유치했다는 데에 이르면 탄복하게 된다. 부산공고에서 김청정은 미술교사 김경(1922~1965)을 만났다.
부산공고 서쪽 담벼락을 타고 흐르는 동천 위에 박고석이 나무 널빤지로 지은 화실 겸 주택이 있었다.
박고석을 만나러 온 이중섭은 이 화실에서 은지화를 그리다가, 술도 마시다가, 잠도 들었다. 이 화실은 김경에게 인수인계됐다. 김청정은 여길 드나들었다.
김청정은 국내에서는 드물게 미니멀리즘에 기반을 둔 기하학적 구조의 조각을 한다. 아방가르드 조각과 향토적인 근대미술을 하나의 화랑에서 기획할 수 있음도 미광화랑의 넉넉함 덕이다.
‘광안리’ 하면 시원한 바다에 인심 후한 횟집들이 떠오른다. 미광화랑 근처에 포항물횟집이 있다. 화랑으로 손님이 찾아오면 김기봉 대표가 모시는 집이다.
부산 사나이의 박력과 야취가 실린 거친 사투리가 이 횟집의 창문을 두드린다. 잡어회 한 점, 소주 한잔에 르네상스를 향한 꿈이 부풀어 오른다.
필자 황인 미술평론가는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인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부산에서의 소박한 시절 재현 위해
천 작가 생면부지 미광화랑 찾아
전시 대성황 이루며 전국에 유명세
지역 중심으로 근·현대미술에 주력
숨어있던 귀한 작품 속속 소개도
미광화랑을 찾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2010년 국내 미술계의 중심작가이자 문화계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천경자 씨의 개인전을 개최해 전국에 이름을 알린 부산 미광화랑 외부 모습.
천경자(1924~2015)의 전시가 부산 광안리에서 열렸다. 때는 2010년, 장소는 미광화랑. 부산에서 천경자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서울의 메이저 화랑에서도 유치하기 힘든 천하의 천경자 작품전이 부산 광안리의 자그마한 미광화랑에서 열리다니.
부산은 우리나라 제2의 도시다. 도시의 크기에 비해 화랑의 숫자는 서울은 물론 가까운 대구에 비해서도 적은 편이다. 그나마 있는 화랑들도 해운대에 몰려 있다. 광안리는 소박한 곳이다. 요즘은 외지 사람들도 광안리 해수욕장을 많이 찾지만, 과거에는 부산 사람들만 찾는 광안리였다. 그런 광안리의 미광화랑에서 천경자전이 열렸다니 뜻밖이었다.
국내 미술계의 중심작가이자 문화계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그녀가 절필을 선언하고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 게 1998년이다. 소식이 끊어졌다. 어느 날 미국에 사는 그녀의 딸 이혜선으로부터 미광화랑으로 전화가 왔다. 미광화랑에서 천경자전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부산은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다. 한반도의 북쪽 남쪽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피란민이 부산에 몰려들었다. 이때 미술인들도 부산에 다 몰려들었다.
서울대 미대 등 미술학교도 다 부산에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환도를 했어도 이들은 당장 부산을 떠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평양 출신의 화가 송혜수(1913~2005)처럼 부산에 아예 눌러앉았다.
김환기, 박고석, 한묵, 이중섭 등 부산을 거쳐 간 미술인들은 너무나 많다. 천경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천경자는 1952년 부산 중구 남포동의 국제구락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수십 마리의 독사가 뒤엉켜 있는 모습을 그린 ‘생태’가 출품되었다. 충격적인 화면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천경자는 유명해졌다. 1959년에는 부산 중앙동 소레유다방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이때는 홍익대 교수로 재직할 때다. 천경자는 부산에서 두 번의 전시를 했던 셈인데, 부산에 대한 기억이 좋았다. 국내 화단에 실망하고 미국으로 간 천경자는 부산에서 보낸 소박한 시절이 그리웠다. 그 시절을 재현할 수 있는 자그마한 화랑을 찾았는데, 그게 생면부지의 미광화랑이었다. 얼떨결에 전시가 이뤄졌고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와 함께 대성황을 이뤘다. 천경자를 유명하게 만든 도시가 부산이었다.
그렇게 유명해진 천경자가 이번에는 부산의 자그마한 화랑을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미광화랑의 김기봉 대표는 충남 광천 사람이다. 1978년에 군 제대를 하고 작은 형이 사는 부산에 왔다가 부산의 매력에 빠져 정착하게 됐다.
1999년 부산 수영구 망미동 토곡에서 미광화랑을 열었다. 이후 광안리로 이전했다. 미광화랑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근·현대미술에 주력했다. 전시는 1세대 서양화가들이 주를 이룬다.
1999년 개관전에는 남관, 송혜수, 장리석, 최영림, 문신 등의 작품을 전시했다. 2000년에는 부산 작고작가 및 원로작가전이 열렸다. 김경, 양달석, 우신출, 임호 등 작고작가와 송혜수, 전혁림, 성백주 등 당시 원로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됐다. 부산 1세대 서양화가들의 전시를 기획하는 일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6·25 때 부산에는 수많은 미술인들이 북적였다. 전쟁이 끝나 화가들이 환도해도 그 후광이 부산에 남아 있었다. 1965년에는 서울 중심의 국전에 저항해 이준, 임호 등이 주도해 전국적인 규모의 ‘민전’을 기획해 전시회를 개최했다. 1960~70년대의 부산에는 실험미술 역시 왕성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부산미술은 중심을 잃고 산만한 흐름을 보여줬다. 그런 탓인지 도시의 크기에 비해 미술의 크기가 작아 보였다.
작가와 작품은 하나의 역사다. 작가를 엮고 작품을 모아서 전시하는 일은 역사를 정리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런 일에 부산의 미술계는 다소 무심했다. 다행히도 미광이라는 의욕 충만의 화랑이 등장해 부산의 미술사를 챙기면서 부산 미술의 르네상스를 꾀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2009년, 개관 10주년 전시로 기획된 ‘꽃피는 부산항’은 부산과 인연을 맺은 김경, 김남배, 김봉진, 김원, 김원갑, 김원영, 김윤민, 김종식, 나건파, 서성찬, 송혜수, 양달석, 오영재, 우신출, 임호, 조목하, 진병덕, 한상돈, 황규웅 등 19인의 화가들이 참여했다. 이후 ‘꽃피는 부산항’ 전시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제9회 ‘꽃피는 부산항’이 열렸다. 27인의 화가가 참여했다. 제1회 전시에는 안 보이던 김영교, 김영덕, 성백주, 신창호, 안세홍, 이득찬, 이규옥, 이석우, 임응구, 정상복, 채정권 등의 이름이 보인다. 임응구(1907~1994)는 부산 최초로 일본 유학을 한 서양화가다. 동생 임응식은 사진가로 유명하다.
전시는 작품이 있어야 가능하다. 근대미술은 작품이 귀하다. 그래서 전시가 힘들다. 그런데도 미광화랑이 전시를 연다고 하면 그동안 숨어있던 작품들이 어디선가 나타난다. 작품의 등장은 미술사를 새로 쓰게 한다. 미광화랑은 이 일을 끈질기게 반복하고 있다.
미광화랑이 근대미술에만 집중하는 건 아니다. 정복수, 김난영 등 부산과 인연이 있는 중견작가들의 전시도 열심히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모더니즘 조각가 김청정(1941~ )의 전시를 유치했다는 데에 이르면 탄복하게 된다. 부산공고에서 김청정은 미술교사 김경(1922~1965)을 만났다.
부산공고 서쪽 담벼락을 타고 흐르는 동천 위에 박고석이 나무 널빤지로 지은 화실 겸 주택이 있었다.
박고석을 만나러 온 이중섭은 이 화실에서 은지화를 그리다가, 술도 마시다가, 잠도 들었다. 이 화실은 김경에게 인수인계됐다. 김청정은 여길 드나들었다.
김청정은 국내에서는 드물게 미니멀리즘에 기반을 둔 기하학적 구조의 조각을 한다. 아방가르드 조각과 향토적인 근대미술을 하나의 화랑에서 기획할 수 있음도 미광화랑의 넉넉함 덕이다.
‘광안리’ 하면 시원한 바다에 인심 후한 횟집들이 떠오른다. 미광화랑 근처에 포항물횟집이 있다. 화랑으로 손님이 찾아오면 김기봉 대표가 모시는 집이다.
부산 사나이의 박력과 야취가 실린 거친 사투리가 이 횟집의 창문을 두드린다. 잡어회 한 점, 소주 한잔에 르네상스를 향한 꿈이 부풀어 오른다.
필자 황인 미술평론가는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인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