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치 질서 흔든 ‘스페인 내전’
프랑코 장군과 파시즘에 대항한
공화진영 ‘내전 속의 내전’ 조명
격렬한 내부 주도권 다툼
전쟁 패배는 예견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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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란 결코 서로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판에 떨어져 존재하는 이상과 현실이라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목표와 제도, 즉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치적 사고에 장애가 되는 것은 없다.” (『20년의 위기』 에드워드 H. 카 지음, 녹문당 펴냄)
20세기 이념의 격전장, 스페인 내전
스페인 내전(1936~1939)은 전간기(戰間期) 막판 세계 정치 질서를 흔들었다. 국제 대리전으로 확산됐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쿠데타를 일으킨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지원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공화 정부를 밀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립에 섰다.
당대 지식인들은 ‘파시즘 반란 저지, 공화국 사수’라는 대의에 집결했다. 이런 명분은 세계 지식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자유와 평등을 수호하기 위해 50개 이상의 국가에서 3만5000여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국제여단’이라는 이름으로 싸웠다.
자, 시간을 1936년으로 돌려보자. 2월 치러진 스페인 총선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세력이 연합한 ‘공화진영’이 승리하자, 이에 반대하는 프랑코 장군의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코를 위시한 ‘국민진영’은 파시즘 세력인 팔랑헤당과 보수적 가톨릭교회, 자본가·지주 계급이 ‘옛 스페인’ 복원의 깃발 아래 단결했다.
단 3년 만에 스페인을 황폐화한 이념 전쟁의 시작이었다. 동시에 스페인 민중과 그들을 억압한 가톨릭교회가 격돌한 종교전쟁이기도 했다.
여기에 자본가·지주 계급과 노동자·농민 계급도 맞붙었다. 게다가 공화진영을 지원한 소련과 국민진영을 뒷받침한 독일이 자신들의 군사력과 전략을 실험한 국제전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확산을 걱정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공화진영에 등을 돌렸다. 이는 공화진영의 패배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외세의 군사력 차이가 승패의 결정적 요인이었을까? 독일과 이탈리아 군대가 프랑코의 승리를 앞당겼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내전 패배의 최대 원인은 공화정부의 무능과 분열이었다. ‘공동의 적’인 국민진영을 앞에 두고 공화진영은 자기 분열했다. 스탈린의 지시를 따르는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이 권력 장악에 나서면서 공화진영 안에서 권력 주도권 다툼이 시작됐다. 내분을 계속하다 자멸의 길인 ‘내전 속 내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내전 중 유혈과 살인은 양쪽 모두에서 이뤄졌다. 3년 남짓 동안 스페인을 휩쓴 이 전쟁은 35만 명의 사망자와 50만 명의 외국 망명자, 30만 명의 수감자를 낳았다.
승자가 된 프랑코는 이후 37년 동안 철권통치를 이어갔다.
땅과 자유를 향한 뜨거운 열망과 좌절
‘블루칼라의 시인’이라 불리는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1996)은 1994년 영국 리버풀에서 한 노인이 심장마비로 숨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품을 정리하던 손녀는 낡은 가방 안에서 오래된 편지 뭉치와 신문 스크랩, 전우들과 찍은 빛바랜 사진을 발견한다.
그 노인은 1936년 노동자의 참전을 독려하는 연설에 감동해 약혼자의 만류도 뿌리치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데이빗(이언 하트).
스페인을 가로지르는 기차 안에서 데이빗은 민병대와 합류하고 군사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여장부 블랑카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파시스트 군이 장악하고 있는 마을 탈환 작전에 투입된 데이빗과 민병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하고, 토지 소유를 두고 주민들 사이에 격렬한 토론을 벌인다.
전면 공유화하자는 주장과 대지주 소유는 공유화하고, 소농 토지는 인정하라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한 것. 난상 토론 끝에 주민 투표가 이어지고 전면 공유화로 결론이 나는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파시스트들과 싸우던 민병대는 파시시트 군이 아닌 공산 인민군에 의해 무장해제당하고, 데이빗의 연인이자 전우인 블랑카는 이에 반발하다가 사살된다.
블랑카의 시신을 싣고 그녀의 고향마을에 찾아간 데이빗. 그는 블랑카의 무덤에서 흙을 담아 고향인 리버풀로 돌아오고, 그 흙은 손녀의 손에 의해 자신의 관 위에 덮인다.
영화는 땅과 자유를 향한 뜨거운 열망이 정치투쟁으로 비화하면서 자멸로 나아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랜드 앤 프리덤’은 86년 전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지식인처럼 매번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한결같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충실해 왔던 켄 로치 감독의 수작이다.
‘스페인 내전서 본 이념의 허상’…조지 오웰 증언록이 영화 뼈대
각자 신념 따라 전쟁터로 간 지식인들
헤밍웨이·말로 등 위대한 유산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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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지식인들은 스페인 내전에 신념을 투사했고 자기 방식대로 유산을 남겼다. 전장으로 달려간 작가 중에 로버트 카파(『어느 병사의 죽음』 1936)가 고발자였다면 앙드레 말로(『희망』 1937)는 기소자의 자리에 섰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940)가 재판관이었다면 조지 오웰(『카탈로니아 찬가』 1938)은 그저 증인의 역할을 맡았다.
한 손에 총을 든 병사가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머리를 맞고 팔을 벌린 채 뒤로 쓰러지는 순간을 포착한 카파의 사진 한 장은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행동하는 지성’ 말로는 1936년 내전에 뛰어들어 파시스트에 맞서는 공화군의 국제 비행대를 조직하고 지휘한 경험을 소설에 담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헤밍웨이(『무기여 잘 있거라』 1929)는 “착한 사람이든 상냥한 사람이든 용감한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죽인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 역시 죽이겠지만 특별히 서두르지 않을 뿐”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스페인 내전에도 종군기자로 참전한 헤밍웨이에게 전쟁은 숙명이었다.
그는 스페인 내전이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한 후 공화파는 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꾸며 바르셀로나에 왔던 오웰이 그곳에서 본 것은 온갖 이념의 허상이었다. 그는 카파처럼 혈기 방장한 젊은이가 아니었고, 말로 같은 설교자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헤밍웨이 같은 집념은 더더욱 없었다.
오웰은 전투 중 중상을 입었고 공화파 혁명의 배신을 경험했다. 그는 좌절했다. 그가 가장 환멸을 느낀 건 공산주의였다. 같은 편이라 믿었던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만의 승리를 위해 위선과 선동을 멈추지 않았던 것. 수배자 신세로 전락한 오웰은 간신히 탈출해 스탈린 공산주의와 히틀러 나치즘의 유사성과 위험성을 증언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는 참혹하게 패하고 말았다. 이겼으면 좋았겠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결국 패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이념 전쟁은 예술로 피어났다.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은 오웰이 꾹꾹 눌러 쓴 증언록 『카탈로니아 찬가』를 토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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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인기 국장은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테크플러스 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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