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이후 스모그 재앙에 큰 충격
오존층 파괴 물질 연구로 노벨화학상
핵전쟁 이후 예측 논문 세계에 경각심
미·소 핵탄두 제한 협상 나선 계기 돼
기후변화 걱정 지구온난화 해법도 제안
평생 과학으로 인류 구원 묵묵히 실천
과학자 파울 크뤼천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1933)는 바로 히틀러가 집권한 해였다. 크뤼천은 나치 점령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크뤼천은 학창 시절 수학과 물리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대학을 포기하고 기술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 엔지니어가 되었지만, 크뤼천은 공부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일하면서 학비를 번 크뤼천은 1958년 스웨덴 여성과 결혼한 후 스톡홀름 대학에 진학해 대기·화학 공부를 시작했다. 대기와 화학에 흥미를 느낀 크뤼천은 대기를 구성하는 물질 연구에 매진했다.
당시 서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에 골몰했고, 공장 가동률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952년 12월, 일주일 동안 영국 런던에서 엄청난 양의 스모그(Great Smog of London)가 발생하여 공식적으로 4000명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스무 살에 접한 이 사건은 크뤼천이 대기·화학을 전공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그는 대기 물질의 이동과 변화가 전쟁보다 더 많은 사람을 위협할 수 있다는 무서운 진실을 평생 잊지 않았다.
1970년, 크뤼천은 토양 미생물에서 분출되는 질소화합물이 성층권의 오존 농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힌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으로 크뤼천은 세계적인 학자로 발돋움했다. 4년 후 크뤼천의 연구를 토대로 미국의 화학자 마리오 몰리나와 셔우드 롤런드는 냉장고와 에어컨의 냉매로 쓰이는 염화불화탄소(CFC)가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오존층 파괴는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세 사람의 연구는 오존층 파괴물질의 제조와 사용을 금지하는 ‘몬트리올 의정서’(1987)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크뤼천은 1995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오존층 파괴물질 규명 말고도 크뤼천은 중요한 연구를 계속 진행했다. 지금은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핵전쟁 이후의 겨울’도 크뤼천의 연구로 알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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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핵전쟁 이후의 대기(The Atmosphere after a Nuclear War)’라는 논문에서 크뤼천은 핵전쟁 이후에 벌어질 기후 변화를 경고했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도시, 농경지, 유전과 가스전 등이 모두 불타게 되고, 그 엄청난 연기가 대기로 유입되면 햇빛을 차단하게 된다. 햇빛이 차단되면 지구 표면이 냉각돼 전 세계 농업 생산이 멈추는 재앙이 발생한다. 크뤼천은 이 과정을 ‘핵겨울(Nuclear Winter)’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냉전이 최고조에 이른 당시에 미국과 소련은 각기 수만 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것은 인류를 수십 번 멸망시킬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크뤼천의 논문 ‘핵전쟁 이후의 겨울’은 전 세계에 경각심을 줬으며 미국과 소련이 핵탄두 제한 협상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크뤼천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이었다. 그는 2000년 ‘국제지구권생물권연구(IGBP)’ 기고문에서 현재의 지질시대를 ‘인류세’로 부르자고 주장했다. ‘인류세’는 1922년 구소련 지질학자 알렉세이 파블로프가 처음 사용한 용어였다. 인류세는 인류를 의미하는 ‘안트로포스(anthropos)’와 시대를 의미하는 ‘세(-cene, epoch)’가 합쳐져 이뤄진 말이다. 지난 1만 년 동안 이어진 ‘홀로세(holocene)’에 이어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지질학 시대를 새롭게 명명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반영된 용어였다. 크뤼천은 인류세의 시작을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한 해(1784)부터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와 메탄의 농도가 증가하기 시작한 18세기 후반으로 제안했다.
2015년, 그를 포함한 과학자 26명은 인류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를 인류가 최초로 핵실험을 실시한 ‘1945년 7월 16일’로 명명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인류세를 논의하는 과학자들은 플라스틱, 콘크리트 잔해, 핵물질, 살충제, 비료 반응성 질소, 온실가스 농축 등을 거론하면서 인간이 지구에 미치는 악영향을 역설했다.
그리고 인류가 끊임없이 양산하는 인공화합물과 찌꺼기들이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은 채 누적되다가 마침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제 인간이 지질학적 변화의 절대적인 상수가 됐음을 선언한 것이다. 크뤼천은 대기권 상층부에 황 입자를 대량 방출해 기온을 낮추는 과감한 지구온난화 해법을 제안하면서 선진국들이 기후변화 예방에 앞장설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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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부터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크뤼천은 2009년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지구환경과학부 초빙 석좌교수로 임명돼 한국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오존층 파괴, 핵전쟁 이후의 겨울, 인류세와 기후변화. 그가 진행한 연구들은 하나같이 오늘날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조류독감, 돼지 인플루엔자,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지카 바이러스 등 2000년대 이래 발생한 바이러스 질환들은 모두 기후변화로 서식지가 파괴돼 기존에는 접촉 가능성이 극히 낮았던 동물과 동물, 동물과 인간의 접촉이 늘어난 결과였다. 아직 뚜렷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의 원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전쟁을 겪으면서 적을 제압하는 강력한 무기를 만들고자 한다. 인류는 스스로 멸망에 이를 무기를 쌓아놓은 채 이윤을 추구하면서 주저하지 않고 환경을 파괴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 않고 질주하던 인류는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서막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전쟁은 언제나 과학의 발전을 선도했다.
그러나 세계대전과 냉전, 팽창하는 자본주의를 몸소 겪었던 어느 과학자는 묵묵히 다른 길을 선택했다. 파울 크뤼천. 그는 눈앞의 삶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삶, 인류의 지속을 꿈꾸었고, 과학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실천으로 옮긴 사람이었다. 2021년 1월 28일, 그는 팬데믹의 종식을 보지 못하고 독일 마인츠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핵겨울 논문을 공동집필한 그의 제자 존 버크스는 “그는 훌륭한 과학자일 뿐 아니라, 내가 이제껏 알고 지낸 사람 중 가장 배려심 있고 인자한 사람”이었다고 애도했다.
필자 이정현은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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