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이은미 조명탄] 관악산 등산기

입력 2022. 11. 14   16:31
업데이트 2022. 11. 14   17:02
0 댓글

이은미 변호사
이은미 변호사


어느 겨울 월요일 오후에 혼자 관악산 연주대에 오르기 위해 나섰다. 주말에 갈 때는 고구마, 떡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등산로 초입에 많이 보이더니 그날따라 등산로에 사람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겨울에는 해가 짧아 등산을 일찍 마친다는 생각을 못 했다.

등산길을 걷다 보니 예전에 갔을 때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그런데 부지런히 가다 앞을 보니 길이 없었다. 온통 낙엽으로 덮여 있어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초반에 뒤따라 오던 부부도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한 바퀴 돌아보니 사방이 낙엽이고 나무들이 무심하게 서 있었다. 인기척도 없고, 멧돼지나 들개라도 만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방금 걸어 들어온 길을 되짚으며 뒤돌아서서 오던 길로 다시 내려갔다. 내려가다 보니 내가 들어선 길은 연주대가 아니라 삼성산, 삼막사 쪽으로 가는 길이란 사실을 표지판을 보고 알게 됐다.

산에서 인생을 배운다더니 엄청난 속도로 직진하던 나는 다른 방향으로 들어서 길을 잃고야 역시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명언을 떠올리게 됐다.

겨우 길을 찾았고, 연주대로 오르려고 위를 쳐다보니 돌계단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다. 한 걸음 한걸음 내 발만 보고 오르다 정상을 앞에 둔 계단 끝을 만났다. 그런데 땅과 물이 얼어 있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추웠고, 산이라 그런지 그늘이 져 빨리 어두워졌다. 인적도 없고 으스스했다. 정상을 앞에 둔 계단 끝에 서서 고민했다. 바람이 이렇게 불고 생명이라곤 까마귀밖에 없는 이 상황에서 굳이 정상에 가야 하나.

보이테크 쿠르티카라는 등산가의 일화가 생각났다. 히말라야의 가셔브룸 서벽은 험난해 정복하기는 어렵지만 8000m에서 딱 75m가 모자라 기록 세우기 좋아하는 산악인들이 그곳은 잘 가지 않는다고 한다. 쿠르티카는 이 서벽을 11일 동안 수직으로 올라 정복했다. 서벽 위에는 히말라야 정상으로 가는 쉬운 길 설능이 있었는데, 쿠르티카는 서벽을 오른 후 히말라야 정상을 앞두고 돌아서면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내 목표는 서벽이었지, 정상이 아니었다.”

정상을 쳐다보며 “내 목표는 칼로리 소모였지, 정상이 아니었다”고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는 뒤돌아서 와다다닥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올 때는 없던 살얼음이 내려올 때는 더 많아져 조심스러웠다. 그러다 인기척에 뒤돌아봤는데 눈만 빼꼼하게 드러내고 나머지는 옷과 모자, 마스크로 다 가린 남자가 따라붙고 있었다. 그는 이상한 가방(만화 주인공 스펀지밥이 그려진 비닐 재질의 가방)을 손에 들고 하산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 나를 응시했다. 뒤돌아볼 때마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정하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섬뜩했다. 그가 뒤에 바짝 붙었을 때는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어두운 산에서 누가 나를 구조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떨렸다. 다행히 그는 내 앞으로 지나갔다. 그런데 멈칫멈칫하다가 그가 발을 멈추고 돌아봤다. 나는 형사사건 변론만 하고 있어 늘 범죄를 본다. 분노범죄, 묻지마 범죄 등. 그가 날 돌아보는 순간, 그냥 생각만 했을 뿐인데 이것이 직업적인 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말할까 말까 망설이던 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리에 나뭇잎 엄청 큰 거 붙었어요.” 나는 손을 떨며 머리를 쓸어내렸다. “아니요. 거기 말고 저기요.” 그의 손짓에 따라 방정맞게 머리카락을 훑으면서 나뭇잎을 떨어뜨리자 그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이번엔 내가 그의 뒤에 졸졸졸졸 따라붙었다. ‘사람이다!’

이상한 사람은 산이 아니라 회사에 있다는 말이 실감 나는 하루였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