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에게 26개의 시폐 상소문 올렸던 탁영 김일손 선생
영귀루 옆 은행나무 두 그루, 탁영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져
처음엔 운계정사로 부르다가 무오사화 이후 자계서원으로…
영귀루·동재·서재, 도 유형문화재 지정 ‘건축적 가치’ 인정
자계서원(紫溪書院)은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탁영(濯纓) 김일손(1464~1498) 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조선 중종 13년(1518년)에 건립된 서원으로, 처음에는 운계서원(雲溪書院)이라고 불렸다. 그 후 선조 11년(1578년)에 다시 지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7년(1615년)에 다시 짓고 조부 절효 김극일과 장질 김대유를 추가 배향했다. 현종 2년(1661년)에 ‘자계(紫溪)’라고 사액돼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고종 8년(1871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24년 후손 김용희가 사재로 존덕사를 비롯해 보인당, 영귀루와 동·서재 등 모든 건물을 중건 및 중수해 서원 전체를 복원했다. 글=박영민/사진=양동욱 기자(항공 촬영=주상현 기자)
구름 빛 안개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이 유난히 맑은 마을. 영남알프스가 병풍처럼 이어지는 운문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선비의 고장 경북 청도군. 예로부터 청도군은 산이 푸르고 물이 맑았으며 깨끗하고 청렴한 선비정신으로 삼청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처럼 선비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곳에 자리한 자계서원은 탁영 선생의 선비정신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자계서원을 이야기하기 전 운계정사(雲溪精舍)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운계정사는 자계서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운계정사는 탁영 선생이 글을 읽던 곳으로, 연산군 4년 무오사화로 탁영 선생이 화를 입자 서원 앞을 흐르던 냇물이 3일 동안 붉게 변한 데서 유래해 서원 이름을 자계서원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사당인 존덕사와 제사 준비를 하는 전사청, 강당인 보인당, 신문, 영귀루, 동·서재 등이다. 이 중 영귀루와 동·서재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서원 내 중앙에 있는 강당인 보인당은 1643년 처음 지어졌고, 현 건물은 1924년 탁영 14세손 김용희 선생이 중건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고상형 집이며 겹처마의 팔작지붕에 활주가 있다. 가구는 5량가이며 연등천장에 우물마루를 깔고 공포는 익공계다. 평면은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온돌방 1칸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며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뒀다. 이곳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과 학문 강학장소로 이용됐다.
영귀루는 1488년 운계정사를 지을 때 같이 지었는데, 1871년 훼철되는 아픔을 겪었다. 현 건물은 1924년에 중건됐으나 2014년 자연 붕괴해 2015년에 다시 중건된 것이다. 영귀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자연석의 초석상에 원주를 세워 누주로 삼고 마루를 놓아 다시 누를 가구했다. 가구는 5량가로 공포는 주심포계에 익공이 절충한 모양이다. 이곳은 원내의 여러 행사를 치르고 유생들이 모여 시부를 짓던 곳이다. 선생 생시에는 추강 남효온,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소총 홍유손, 풍애 우선언 등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영귀루 글씨는 용현 이중균이 썼다고 한다.
운계정사란 이름을 가진 동재는 1488년 9월 탁영 선생이 25세 때 건립해 선생이 책을 읽거나 제자 양성을 위한 강학공간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현 건물은 1924년에 중수한 것으로 건축기법은 그 유례가 흔하지 않으며 청도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보인당 주축 선에는 영귀루와 유직문이라는 외삼문이 있고 보인당 동쪽에는 존덕사와 전사청, 내삼문인 유현문이 따로 나 있다. 이 중 사당인 존덕사는 2단으로 네모진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지어진 겹처마 맞배지붕 집이다.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고 전면에 평삼문인 유현문을 신문으로 사용하며 주위에 기와를 얹은 토석담을 둘러 사당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영귀루 옆에는 탁영 선생께서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원을 지키듯 서 있다. 두 나무 중 영귀루 쪽의 은행나무가 원래의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뒤에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자계서원의 은행나무는 거의 밑바닥부터 6개의 줄기가 나와 둘러싸고 있는데 심을 당시의 줄기는 죽어 버리고 옆에서 맹아가 올라와 지금의 모양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고 김형수 학교법인 모계학원 이사장은 설명했다. 김 이사장은 1924년 서원을 중건한 김용희 선생의 증손자로 서원관리 책임을 맡고 있다.
나무 밑엔 나지막한 대리석 석단을 두르고 있으며 보호가 잘돼 있어 생육상태는 매우 좋다. 또 다른 은행나무는 두 나무를 가까이 붙여 심은 것으로 보이며 높이 1.5m까지 줄기가 합쳐진 연리목이다. 이 나무 앞에는 탁영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탁영선생수식목(濯纓先生手植木)’이라는 작은 표석이 서 있다. 또 영귀루 동쪽으로 ‘절효 김 선생 정려비’라고 쓴 탁영 선생의 조부 비가 있다. 서쪽엔 서원정비 등이 있는 자계서원은 조선 초기 역사와 건축을 볼 수 있는 곳으로 학자와 유림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곳이다.
탁영 김일손 선생은 1464년(세조 10년) 경북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 본관은 김해다. 선생의 가문은 정통 영남 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했다. 조부인 김극일(金克一)은 길재(吉再)에게 학문을 배웠고, 부친 김맹도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에게 학문을 배웠다. 김일손 또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김일손은 어린 시절 용인에서 자라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필독교재인 『소학』을 배운다. 이후 정중호, 이맹전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선생은 성종 17년(148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해 예문관에 등용된 후 청환직을 거쳐 이조정랑이 됐다. 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화근이 돼 참화를 당했다. 이 사건을 무오사화라고 하며, 중종반정 후 도승지와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에 추증됐다. 선생은 연산군에게 26개의 시폐 상소문을 올리는 등 그의 직필정신은 후세에도 직언을 아끼지 않는 선비의 기상을 일깨우고 있다. 이러한 선생의 선비정신은 이후 청도의 많은 선비에게 이어지지만 관직에 나아가기보다 향촌에 남아 유학 증진에 매진하게 된다. 이는 선생이 무오사화로 화를 당한 이후 청도에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향촌에 은거, 유학을 공부하며 처사임을 자처하는 흐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청도의 선비문화가 형성됐는데 강직과 절개, 의리를 실천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후대에 내려와서도 일제강점기의 호적거부운동을 통해 선비의 절개를 보여 준 덕천 성기운, 20세기 말 청도의 마지막 선비라고 일컬어지던 인암 박효수까지 유학의 도를 지킨 선비의 삶이 유품으로 남아 있다. 특히 인암 선생은 마지막 유림장(儒林葬)을 치른 것으로 유명한데 1997년 1월 ‘주자가례’의 원칙을 지켜 치러져 선비의 장례문화를 현대에 보여 줬다.
연산군에게 26개의 시폐 상소문 올렸던 탁영 김일손 선생
영귀루 옆 은행나무 두 그루, 탁영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져
처음엔 운계정사로 부르다가 무오사화 이후 자계서원으로…
영귀루·동재·서재, 도 유형문화재 지정 ‘건축적 가치’ 인정
자계서원(紫溪書院)은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탁영(濯纓) 김일손(1464~1498) 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조선 중종 13년(1518년)에 건립된 서원으로, 처음에는 운계서원(雲溪書院)이라고 불렸다. 그 후 선조 11년(1578년)에 다시 지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7년(1615년)에 다시 짓고 조부 절효 김극일과 장질 김대유를 추가 배향했다. 현종 2년(1661년)에 ‘자계(紫溪)’라고 사액돼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오던 중 고종 8년(1871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24년 후손 김용희가 사재로 존덕사를 비롯해 보인당, 영귀루와 동·서재 등 모든 건물을 중건 및 중수해 서원 전체를 복원했다. 글=박영민/사진=양동욱 기자(항공 촬영=주상현 기자)
구름 빛 안개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이 유난히 맑은 마을. 영남알프스가 병풍처럼 이어지는 운문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선비의 고장 경북 청도군. 예로부터 청도군은 산이 푸르고 물이 맑았으며 깨끗하고 청렴한 선비정신으로 삼청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처럼 선비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곳에 자리한 자계서원은 탁영 선생의 선비정신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자계서원을 이야기하기 전 운계정사(雲溪精舍)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운계정사는 자계서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운계정사는 탁영 선생이 글을 읽던 곳으로, 연산군 4년 무오사화로 탁영 선생이 화를 입자 서원 앞을 흐르던 냇물이 3일 동안 붉게 변한 데서 유래해 서원 이름을 자계서원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사당인 존덕사와 제사 준비를 하는 전사청, 강당인 보인당, 신문, 영귀루, 동·서재 등이다. 이 중 영귀루와 동·서재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서원 내 중앙에 있는 강당인 보인당은 1643년 처음 지어졌고, 현 건물은 1924년 탁영 14세손 김용희 선생이 중건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고상형 집이며 겹처마의 팔작지붕에 활주가 있다. 가구는 5량가이며 연등천장에 우물마루를 깔고 공포는 익공계다. 평면은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온돌방 1칸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며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뒀다. 이곳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과 학문 강학장소로 이용됐다.
영귀루는 1488년 운계정사를 지을 때 같이 지었는데, 1871년 훼철되는 아픔을 겪었다. 현 건물은 1924년에 중건됐으나 2014년 자연 붕괴해 2015년에 다시 중건된 것이다. 영귀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자연석의 초석상에 원주를 세워 누주로 삼고 마루를 놓아 다시 누를 가구했다. 가구는 5량가로 공포는 주심포계에 익공이 절충한 모양이다. 이곳은 원내의 여러 행사를 치르고 유생들이 모여 시부를 짓던 곳이다. 선생 생시에는 추강 남효온,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소총 홍유손, 풍애 우선언 등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영귀루 글씨는 용현 이중균이 썼다고 한다.
운계정사란 이름을 가진 동재는 1488년 9월 탁영 선생이 25세 때 건립해 선생이 책을 읽거나 제자 양성을 위한 강학공간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현 건물은 1924년에 중수한 것으로 건축기법은 그 유례가 흔하지 않으며 청도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보인당 주축 선에는 영귀루와 유직문이라는 외삼문이 있고 보인당 동쪽에는 존덕사와 전사청, 내삼문인 유현문이 따로 나 있다. 이 중 사당인 존덕사는 2단으로 네모진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지어진 겹처마 맞배지붕 집이다.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고 전면에 평삼문인 유현문을 신문으로 사용하며 주위에 기와를 얹은 토석담을 둘러 사당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영귀루 옆에는 탁영 선생께서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원을 지키듯 서 있다. 두 나무 중 영귀루 쪽의 은행나무가 원래의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뒤에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자계서원의 은행나무는 거의 밑바닥부터 6개의 줄기가 나와 둘러싸고 있는데 심을 당시의 줄기는 죽어 버리고 옆에서 맹아가 올라와 지금의 모양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고 김형수 학교법인 모계학원 이사장은 설명했다. 김 이사장은 1924년 서원을 중건한 김용희 선생의 증손자로 서원관리 책임을 맡고 있다.
나무 밑엔 나지막한 대리석 석단을 두르고 있으며 보호가 잘돼 있어 생육상태는 매우 좋다. 또 다른 은행나무는 두 나무를 가까이 붙여 심은 것으로 보이며 높이 1.5m까지 줄기가 합쳐진 연리목이다. 이 나무 앞에는 탁영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탁영선생수식목(濯纓先生手植木)’이라는 작은 표석이 서 있다. 또 영귀루 동쪽으로 ‘절효 김 선생 정려비’라고 쓴 탁영 선생의 조부 비가 있다. 서쪽엔 서원정비 등이 있는 자계서원은 조선 초기 역사와 건축을 볼 수 있는 곳으로 학자와 유림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던 곳이다.
탁영 김일손 선생은 1464년(세조 10년) 경북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 본관은 김해다. 선생의 가문은 정통 영남 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했다. 조부인 김극일(金克一)은 길재(吉再)에게 학문을 배웠고, 부친 김맹도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에게 학문을 배웠다. 김일손 또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김일손은 어린 시절 용인에서 자라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필독교재인 『소학』을 배운다. 이후 정중호, 이맹전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선생은 성종 17년(148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해 예문관에 등용된 후 청환직을 거쳐 이조정랑이 됐다. 연산군 4년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화근이 돼 참화를 당했다. 이 사건을 무오사화라고 하며, 중종반정 후 도승지와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에 추증됐다. 선생은 연산군에게 26개의 시폐 상소문을 올리는 등 그의 직필정신은 후세에도 직언을 아끼지 않는 선비의 기상을 일깨우고 있다. 이러한 선생의 선비정신은 이후 청도의 많은 선비에게 이어지지만 관직에 나아가기보다 향촌에 남아 유학 증진에 매진하게 된다. 이는 선생이 무오사화로 화를 당한 이후 청도에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향촌에 은거, 유학을 공부하며 처사임을 자처하는 흐름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청도의 선비문화가 형성됐는데 강직과 절개, 의리를 실천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후대에 내려와서도 일제강점기의 호적거부운동을 통해 선비의 절개를 보여 준 덕천 성기운, 20세기 말 청도의 마지막 선비라고 일컬어지던 인암 박효수까지 유학의 도를 지킨 선비의 삶이 유품으로 남아 있다. 특히 인암 선생은 마지막 유림장(儒林葬)을 치른 것으로 유명한데 1997년 1월 ‘주자가례’의 원칙을 지켜 치러져 선비의 장례문화를 현대에 보여 줬다.